이우환
현대에 들어와 ‘미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 왕덕경의 <빈집, 머물러 있는 것들>, 윌렘 드 쿠닝의 <무제> 등과 같이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생소하게 보이는 예술 작품들이 대다수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거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대 예술가들은 일상에서 자주 보일 법한 것들, 그리고 어떠한 구체적인 형상을 제거한 색과 선과 면들로만 표현한 추상 작업들, 하물며 이미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전시장에 놓은 작품들, 그린 것이 아닌 글로 프린팅 한 작품들을 미술관에 전시해 놓는다. 이처럼 현대에 들어서 일상적인 것들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졌고, 미술이라는 것은 꼭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이우환의 작품들 또한 그렇다. 잔디 위에 놓여 진 바위와 철판들, 미술관의 한 공간에 놓인 캔버스, 그저 점과 선들을 캔버스 위에 그려놓은 것들을 보고 사람들은 생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어떻게 느껴야 할 것인가?’
부산에는 그의 작품을 모아 둔 장소가 있다. 그곳은 부산 시립 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이다. 전시장에 들어가기 전, 잔디에는 그의 작품 <회의, 철판, 자연석, 2015> 등 다수의 작품이 있는데 그의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모호하게 느껴지는 작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바위에서 발산해 오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그 에너지는 무엇이며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힘일까?
그의 작품, 공간들을 보자마자 떠오른 단어가 있다. ‘시(詩)’이다. 시는 비유적이며 함축적이다. 또한 시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시를 느끼기 힘든 사람도 있다. 그만큼 개개인마다 인생에서 경험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즉, 인생 자체에 빠져들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개인의 인생 자체보다는 성과나 혹은 사회에 더욱 더 중점을 두는 사람들이 있는 등 세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마치 책에 있어서도 장르가 여러 가지인 것처럼 개개인의 인생에 대하여도 장르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기에 시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점들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 또한 시를 느끼는 방식과 비슷하다.
그의 작품을 보고 왜 바위에 철판이나 유리판 등을 조합한 것이 미술이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의 작품을 보고 잔잔하게 울려오는 생동과 생명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 지닌 ‘표현’적인 특성보다는 ‘제시’적인 특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통하여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대신 우리에게 넌지시 ‘제시’하며 암시한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함축적이고 비유적이며 시적이다.
부산 시립미술관의 <이우환 공간>에 들어가 처음으로 주의 깊게 본 작품은 <관계항-좁은 문,2015, 철판, 자연석> 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공간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석에 놓인 이 공간을 보면, 바닥에 하얀 색 자갈들이 놓여 있다. 그러기에 이곳을 들어가도 될지 망설여진다. 작품 밖에 놓인 관람선 조차 없다. ‘들어가지 마시오.’ 혹은 ‘들어가시오.’ 라는 문구 자체도 없다. 하지만 작품의 캡션이 안쪽에 놓여 있기에 이 공간 자체가 작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이우환 화백이 작품과 관람자 간의 경계와 거리를 많이 허물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에는 ‘바위’라는 매개체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그 바위들은 어떠한 ‘에너지’들을 품고 있다. 에너지란 인간이 활동하는 근원이 되는 힘(네이버 지식백과), 즉 정력, 활기 등을 가리킨다. 그 바위라는 물체가 비단 ‘사람’으로 비유되지 않아도 분명 그의 바위 속에는 어떠한 시선과 속삭임이 담겨져 있다. 그의 바위들은 사람의 이목구비와 같이 구체적인 형상이 없더라도 서로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고 속삭이고 경청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 작품은 가운데가 뚫린 철판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벽을 사이로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는 바위들이 있다. 이 바위들을 보면 관계에 대한 거리, 혹은 세계와 세계 사이의 공간들을 느낄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은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라는 공간을 가지고 있고 타인은 그 공간을 잠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혹은 개인에 의하여 자신의 공간을 완전히 밀폐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타인이 어떠한 개인의 공간을 완전히 침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개인 간의 공간에서 벽이라는 서로의 멀고도 가까운 거리를 제시해 놓고 그 벽 사이에서 서로 소통하고 서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이미지를 암시적으로 제시했다. 개인들은 벽 사이에 뚫린 공간으로 서로가 넘나들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공간 자체를 배려하고 침범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하여 읽을 수 있다. 또한 바위 간 놓인 철판을 통하여 바위 간의 간절함이 더욱 느껴지는 듯 하다.
다른 공간에 가면 그의 회화작품들이 놓여 있다. 그의 회화 작품에서는 간결함과 섬세함, 그리고 대범한 힘이 느껴진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고 물결이 출렁이는 것 같은 심상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잔잔하고 사람을 할퀴지 않는 것들, 뭉쳐져 있다가 자연스레 퍼지는 낙엽들이 느껴진다. 바닷가에 갔을 때 살포시 내 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따뜻한 바람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또한 넘실거리는 숲의 흐름들, 그것을 위에서 바라보는 시선들, 그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심상이 바로 그것들이다.
마지막 작품들을 보러 가는 도중에 있던 그의 작품 <대화, 2014, 캔버스에 유채, 혼합안료, 291x281x6 cm>. 이 작품들을 본 대중들은 줄곧 말하곤 했다.
“점 하나가 이렇게 비싼 작품이라고?”
어떤 작가의 작품을 보면 그 작가의 성향과 성격이 보인다. 그 작품 자체에 그 사람의 인생 중 한 줄기, 혹은 인생 전부가 담겨져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동양화 작품들에서는(전통적인 동양화 작품들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의 감정이나 인생, 성격 등을 읽기 쉽다. 동양화의 선 하나만 보더라도 그 사람에 대한 것들이 자연스레 읽힌다. 그 사람이 대범한가, 소심한가, 섬세한가, 열정적인가, 서정적인가, 따위의 것들 말이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이우환의 작품들은 동양화적인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 <대화>라는 작품이 얼마나 대범하고 얼마나 계산적으로 정확하고,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는가, 가 많이 드러난다. 작품을 자세히 보면 한 선에 담겨진 질감, 두께감과 그라데이션, 한 면에 담긴 자잘한 선들, 섬세함, 대범함이 굉장히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그러기에 비단 이 작품에 담긴 선(혹은 면)은 결코 그저 ‘선’혹은 ‘점’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지막 공간을 가면 <대화, 2015, 캔버스, 자연석, 캔버스 – 218x291x5cm, 자연석 – 100 x 100 x 100(h) cm 이내> 라는 작품이 있다. 이것은 마치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것 같다. 무엇을 표현하고 제시할지, 저 하얀 캔버스 위에 올라갈 것은 그림인지 표현인지 시인지 혹은 자기 자신의 일부인지, 자기 자신의 전부인지, 마음인지. 그러한 것을 바라보는 심상을 일으킨다.
<이우환 공간>이라는 공간을 통하여 우리는 아주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을 느끼고 읽어내며 작품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의 인생까지도 읽어낼 수 있는, 마치 시의 행들을 찬찬히 읽어가는 듯한 감흥을 일으킨다. 마지막 작품 <대화>를 통하여 그 시는 끝을 맺는 동시에 이 공간에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시를 쓰게끔 만든다.
그의 작품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설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에게 작품이 품고 있는 에너지를 넌지시 던진다. 그 작품이 던지는 에너지를 느끼고 읽을 수 있는가는 우리의 몫인 것이다.
우리 일상에는 시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말로 담기지 않을 만큼 인생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주고 느끼게 하는 게 시이다. 목표와 성과를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소소함과 씁쓸함,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게 시이다. 인생이라는 것 자체를 우리와 직면하게 해주는 게 시이다. 이우환 화백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울림은 시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하게 전환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해답과도 비슷한 지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하여 예술의 경계에 대한 모호함을 느끼는 동시에 우리 일상 또한 예술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또한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