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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i Feb 21. 2018

영화 <리틀 포레스트>

곶감이 맛있어졌다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

곶감이 맛있어졌다는 건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

리틀 포레스트    

글 : 박하리      

  

* 이 글은 브런치 무비 패스 시사회를 본 뒤 작성한 글입니다.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 있고 스포가 있는 글입니다.         


   배우에게 역할과 이미지는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를 배우인 이자벨 위페르는 영화에서 항상 자기 자신으로 남는다. 어떠한 영화를 보아도 극 중 이름이 아니라 ‘이자벨 위페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역할을 맡든 그 역할들이 자기 자신 같다.

   김태리 또한 그렇다. 어찌 보면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들을 맡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항상 자기 자신에게 색이 잘 받는 옷을 입은 것 마냥 착 달라붙는 연기를 한다. 그리고 그녀 또한 ‘김태리’로 남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섬세한 감정이 담겨있다. 그것에 걸맞은 슬픈 역할을 연기할 것 같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대체로 억척스럽고 자연스럽고 투박한 역할을 맡아왔다. 그 대조되는 여러 분위기들은 합쳐져 김태리라는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냈다.


김태리의 눈빛에는 어린 아이의 순수함과 농익은 어른의 깊은 감정이 동시에 담겨있다. 묘하고 매력적이다.


   이 영화 또한 그렇다. 포스터를 보고 억지스러울 것 같은, 감동 쥐어짜기 영화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자연스러운 영화였다. 하고 싶은 말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말을 툭 던지는 영화였다. 그 말을 잡아내는 것 또한 관객이고 잡지 못하고 그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또한 관객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시골에서부터 시작된다. 혜원은 서울을 떠나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과거, 아버지가 병에 걸리신 뒤 가족이 함께 내려왔던 아버지의 고향,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그 뒤, 혜원의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 그녀는 정말 세상에 자신 혼자 툭, 하고 던져졌다. 그녀는 떳떳하게 살기 위해 서울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 떳떳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자기 자신? 그저 엄마라는 가족이면서 타인에게 당당하고 보란 듯이 살고 싶어 떠난 것이 아닐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고시 공부를 하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던 혜원

   그녀는 임용고시에 떨어지고 도피하듯 시골로 내려온다.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말이다. 자신의 주체성 또한 상실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눈 속에 파묻힌 배추를 캐내어 국을 끓여 먹는다. 그녀는 국을 ‘스스로’ 끓였다. 그것은 바로 어렸을 때 엄마가 하셨던 요리를 옆에서 보며 자란 덕이다.

   이 영화에서는 자연의 모습, 농사, 요리가 주요 소재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다. 혜원(김태리)과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 이 세 친구는 혜원의 집에서 모여 요리를 해 먹거나 직접 술을 담가 먹는다. 이해관계는 사라지고 신뢰와 친근함만 있는 오랜 친구사이이다. 그들 또한 자연 그 자체이다.

막걸리를 직접 만들고 전과 함께 먹는 그들. 향토적이며 풍부한 색감과 많은 보정을 거치지 않은 싱그러운 생기들이 영화의 주를 이루고, 감각적인 미장센이 돋보였다.
빛과 색감이 단연 돋보였던 시퀀스. 빛의 생기들이 우리들의 어린시절 해맑음을 상기시켜주었다.


   현대 사회를 보면 대체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들이 많다. 정갈하고 다듬어진 것들, 그리고 굉장히 깔끔한 것들. 그것이 바로 현대사회라는 것을 대변한다. 깨끗함을 추종하고 그것들만이 남길 바란다. 무엇이든 의심하기 바쁘다. 또한 편안하게 살기를 희망하고 편안함에 빠지다 보면 약간의 힘듦과 상처에도 쓰러지기 바쁘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편안함이란, 많은 ‘소유’를 필요로 한다. 많은 소유는 인간 ‘스스로’ 해야 함을 줄인다. 우리가 소유한 그것들이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계일 수도, 인력일 수도 있다. 스스로 해야 함이 줄면 편안함이 느는 대신 불편함에 대한 면역이 떨어진다. 즉, 불편함이 이전보다 훨씬 더 예민하고 과도하게 느껴진다. 또한 스스로 해야 함이 줄면 자기 자신의 존재 또한 서서히 희미해진다. 자기 자신이란, ‘스스로 일어나려고 부단히 애쓰는’ 그 과정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일어나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은 무엇에서 시작되고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체험’이다. 가짜 체험 말고, 진정으로 느낀 진짜 체험 말이다. 이 영화에서 진짜 체험은 자연 속에 있다. 직접 감자를 캐고, 직접 밤송이를 두 발로 벌리고, 직접 양배추를 씹어 먹으며 그것의 비릿함과 고소함과 단맛을 느끼는 것. 약간의 소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이전에 먹어본 미각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 아카시아를 튀겨가며 그 튀김의 질감을 혀에 감싸는 것. 그러한 과정들은 비단 과정으로만 남지 않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일부로 스며든다. 대처 능력이 되고 자신의 성격 중 일부로 탄생된다. ‘일’과 ‘상황’은 언제나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 암기가 아니라 체험을 하여 삶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 관두고 스스로 고향으로 내려온 재하. 폭우 때문에 나뒹굴어진 사과들을 본 뒤 그는 말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 서울같이 사기같은 게 없으니."
감자를 심는 장면. 기다린다. 기다려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다.

   90년 대 생까지 하더라도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것은 그들의 조부모 댁이 대부분 시골 쪽이라서 자연에서 큰 아이들이 많은 것이다. 그 아이들은 자연에서 직접 체험하며 자란다. 밤에 듣는 벌레 소리가 무엇인지, 할머니 자전거를 훔쳐 타 놀며 논밭을 날아다니는 잠자리 떼를 직접 보며 그들이 머리 위로 똥을 싸진 않을지 귀엽게 노심초사하며, 진달래꽃의 꿀을 쪽쪽 빨아먹으며 콩 벌레를 굴리며 노는 것이 그들의 삶 중 일부였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행복했고 햇볕에 타 새까만 얼굴이 되어도 신경 쓰지 않고 팬티 바람에 계곡에서 세수를 하며 그 물의 차가움과 따뜻함을 익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이전의 아이들과 다르게 커가는 방식에 놀랍다. 그들은 말끔하고 단정하고 비슷한 박자로 걷는다. 응용력이 부족하고 어른들이 만든 틀에 갇혀 그것이 자신의 길인 것 마냥 틀에 부딪히지도 않고 무난하게 ‘부모님 손을 잡고’ 걷는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 현대이다. 우리는 많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아이들에게 피아노와 태권도는 아주 기본이다. 영어, 중국어, 바이올린, 미술, 무용, 수영, 체조, 하물며 가야금까지 취미로 배우는 아이도 보았다. 성인들을 보아도 그렇다. 스펙을 키운다. 예를 들어 토익, 토플, 중국어, 여러 가지 자격증, 인턴, 서포터스 등등. 우리는 과연 무엇을 키우고 싶은 것일까? 잘 하는 것을 키우고 싶은 것일까?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일까? 많은 것을 소유하며 편안하게 살고 싶은 것일까? 하지만 그 끝은 과연 어디일까? 저러한 것들이 과연 우리의 방향과 길을 선택하여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현대의 문명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것들을 찾고 키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나 자신도 완벽하게 떳떳하고도 말할 수 없다.

   ‘삶’이라는 것은 그저 수동적으로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안에서 부단히 찾고 나 자신이 무엇을 찾는지조차 모르게 찾고, 경험하고, 그 경험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그것을 뼈에 새기며,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응용할 수 있는 모습을 찾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덤덤하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은 그러한 경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지 무엇이며 자신이 갈망하고 열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남겨진 결핍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다가 그 고민의 끝이 보일 무렵이 나면 밖으로 찾아 나서는 게 바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혜원의 엄마와 고등학생 시절의 혜원이 토마토를 먹으며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혜원은 엄마에게 연애하고 싶으면 자신 눈치 보지 말고 하라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혜원의 눈치를 보며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고 하였다. 그녀는 다 먹은 토마토 찌꺼기를 던지며 말한다.     


혜원의 엄마와 고등학생인 혜원


   인생은 타이밍이다.      


   저렇게 아무렇게 던져놓아도 싹이 나고 열매가 나서 다 큰 토마토가 되려면, 일단 완숙인 토마토를 던져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혜원의 엄마는 남편과 결혼하여 친정어머니께 잘 산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남편은 죽고 그녀는 친정과 연락을 끊었다.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자신이 떠나야 되는 타이밍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중간 과정에는 자기 자신을 익히는 것을 체험한 그녀였다.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는 혜원의 엄마. 그녀는 혜원의 엄마이기 이전에 '개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준비된 태도, 그리고 완전하고 적당하게 익은 그 자체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타이밍인 동시에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완숙’인 것이다.

   기회는 언제나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언제’가 정말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자기 자신을 완숙하기 위함으로 이끈다. 언제 올지 모르는 그 기회를 물어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꽉 잡아 뜯는 것, 그 이전에는 우리의 완숙함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딜 가든 이상이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먼 곳에서 사랑을 찾곤 한다. 그 사랑은 이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골에서 살았던 혜원 또한 도시라는 곳을 이상으로 삼고 그곳으로 떠났지만 유토피아는 발견하지 못하고 회피하듯 다시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도시로 가고 그곳에서 또다시 시골로 ‘스스로’ 돌아온다. 떠밀려서 내려온 것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 그 자체로 다시 돌아온다.

   이 영화는 자연이라는 것을 찬미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연 속에서 발견한 자신과 체험한 자기 자신을 꾸준히 찾으며 자신의 텃밭을 키우라는 것. 그것이 자연이든 도시이든, 그곳이 어디에서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쯤에서는 말한다.  


   곶감이 맛있어졌다는 것은 겨울이 깊어졌다는 뜻.  


"아빠가 떠난 후에도 너를 이곳에 머물게 한 까닭은 자연의 것들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털고 이겨낼 단단한 힘 가지게 말이다."

   그리고 혜원은 고향 집의 문이 열려있고 커튼이 살랑거리는 것을 발견한 뒤 웃는다. 그 문 뒤에 있는 존재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떠난 어머니 일지 혹은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자신일지 혹은 다른 무엇인가일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의 삶 자체는 사실 도착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처럼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계절과도 같다. 자신 스스로에게 비슷한 상황이 또다시 처해졌어도 대처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비슷한 온도의 계절이지만 그 계절의 냄새를 느끼는 방식이 달라진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 자신을 헤매다가, 찾아서 몰두하고, 또다시 헤매고 찾기를 반복하는 것. 과격하게 쓰러졌다가도 단 한 번도 쓰러지지 않았다는 듯 벌떡 일어나 전력질주를 하다가도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현재라는 시간 속의 빛을 머금으며 걷는 것. 그런 것들을 직접 자기 자신이 느끼며 사는 게 바로 우리의 삶 아닐까?            


- 이 글에 첨부된 모든 이미지는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습니다. 문제가 있을 시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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