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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지만 색깔이 없는 꽃

by hari

나는 당신을 알고 당신도 날 알았다 하지만 당신은 날 몰랐고 나도 당신을 몰랐다. 문질리어 으깨진 색깔 없는 꽃처럼 우리는 그것의 덩어리만, 그리고 선만 희미하게 남겨두고


가운데 그리고 모서리, 안 보이는 사각지대까지의 색 마저 투명이 되었다. 아니 그냥 흰 색이 되었고 서로 다른 색을 집어넣었다. 붉음만 남기고.


창가에 비치는 검붉은 꽃만을 바라보며 그 형태를 따라갔다. 힘차게 뛰어오르는 작품을 보며 어떠한 혼 같다는 말로 버무렸고 나는 자꾸만 무엇을 끼적였다. 한 번도 수정하지 않은 글귀들이 모여 한 덩어리가 되고 단락이 되고 차르르 내려가는 언어가 되고 자연스레 연결되는 몇 년간의 나날들이 되고 상상 속 언어가 되고 나는 그것에 빨려 들어가고 그도 빨려 들어가고


나는 퍼렇다 퍼렇다. 그는 나에게 퍼렇다는 이름을 지어주고 지금까지의 나를 인도하고 나는 꾸준히 퍼런 글을 쓰고 퍼런 그림을 그리고 퍼런 기억을 되감고 잊지 말겠다 다짐하고 종이 눈발처럼, 내리는지 올라가는지 가늠 안 되는 퍼런 눈 쳐다보며,


다시는 당신의 눈을 쳐다보지 못할까?


나 혼자 어디에선가 머물며 다시 그러며 지낼까?


퍼렇게 퍼렇게 흩날리는 꽃들을 보았다 그가 그린 따스함과 내가 그린 차가움이 섞여


나는 당신을 알면서 모르고 당신도 나를 알면서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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