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이태원
사람의 본능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사진 한 장으로도 그 사람에게 반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롭다. 처음 그 사람을 본 건 사진이었는데, 은연 중에 좋아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서로 자리잡은 위치라는 조건 때문에 그랬다.
나는 사랑이 사람을 구해준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픔에 빠져 있을 때, 고통스러워 할 때 사랑 자체가 그 사람의 고통을 이겨내도록 도와준다.
나는 공황장애가 있다. 공황장애는 본인이 만들어 낸 망상 때문에, 곧 죽을 것 같은 공포와 더불어 심장이 미친듯이 뛴다. 곧장 쓰러질 것 같고, 죽지도, 살지도 못 하는 기분이 반복되어 그 자체가 고통이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공포가 내 앞에 엄습한다.
일 년 전 그 날, 나는 카페에서 S와 함께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카페인이 있고, 불안한 말을 들으면 나는 공황장애가 찾아오는데 그 날이 그랬다. 하지만 그 때 S가 나에게 본인의 아픈 것들을 털어놓았다. 나 또한 그것을 들으면서 아팠지만, 그 사람을 위해서 견디며 들어주었다. 내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위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시간동안 flee flee라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태원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람의 팔뚝을 잡고, 그 사람은 어색해했다. 자연스레 손이 아래로 향했고, 나는 그 사람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사람의 손은 헐렁했지만 몇 분뒤 우리는 서로를 꼭 잡았다. 사람이 아주 많았고, 아는 사람이 마주칠 위험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걸었다.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안자."
한 번의 포옹이 있었다.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를 안을 때, 그는 나에게 맞추어 무릎을 구부리고, 나는 그에게 맞추어 까치발을 했다. 어정쩡한 우리의 자세가 우리의 사랑을 보여주듯 어설프면서 순수했다.
길가에서 종종 멈추며 '우리 안자.' 라고 말을 하곤 하였고, 몇 번의 포옹 끝에, 이태원 거리 중 음식점이 많은, 그리고 사람들 또한 많은 그 거리에서 우리는 또 한 번의 포옹을 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마주쳤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대로 키스를 했다. 나와 그의 눈빛을, 내 영혼이 그대로 빠져나와 객관적인 관찰자가 된 것 마냥 그림으로 그 장면이 그려진다. 주위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 고요했고,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그리고 사랑으로 모든 것이 풍족하게 채워졌다. 행복했다. 눈에서 빛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러한 사랑스러운 느낌에 눈물이 흐를 것도 같았다.
눈을 감고 키스를 했을 때, 그리고 또 눈을 뜨고 그를 지그시 쳐다봤을 그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면서도 꿈을 꾸듯 너무나 커다란 행복감이 자리잡혀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시 길을 걸었다.
보건소 앞에서 앉아서 대화를 했다.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 조차 못하는 관계였지만, 서로의 매력에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였다.
서로를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같이 길에서 머물러 있다가, 정말로 헤어져야 되는 순간은 이태원 4번 출구였다.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가 계단 한 칸 한 칸 내려갈 때마다 내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고통을 느꼈고, 계속하여 잡을지 말 지 고민했다. 잡는다는 건 본능이었고, 잡지 못한다는 건, 내가 깨지 못하는 현실의 벽이었다. 우리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우리가 만나서는 안 되는 이유가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나는 집으로 울며 뛰쳐갔다. 그 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할퀴었고, 서로 상처를 받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고, 사랑하는 방식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일 년이 지났다. 가끔 그를 마주칠 때마다 아팠다. 핑크 빛의 S의 얼굴이 내 곁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내가 머물러 있어야 하는 다른 사람 옆에 항상 붙어있었다. 그 사람은 마치 나의 아버지같은 영향력이 있는 존재이기에 나는 그에게 자발적 예속을 하곤 했다. 하지만 S는 어떠한 조건 없이, 그리고 어떠한 예속 또한 없이 순수한 본능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를 느낄 때 마다 마음이 핑크색으로 변하다가도, 진득한 붉은 색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그리고 잊히는 듯 싶다가도, 그것이 그저 숨겨있는 본능이란 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보고싶다고 말하였다. 마음 속 현실의 허술한 벽이 산산 조각난 듯 후련했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말을 일 년 동안 하지 못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서로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오늘, 갑자기 이태원 거리의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안타깝게 끝난 순간들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운 기억들이 되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S에게 연락을 했다.
"오빠, 보고싶다. 나 롱아일랜드 언젠간 놀러갈건데 그때 나 만나야 돼 알겠지?"
"그때 눈을 마주쳤을때 잠시 가만히 보고있자. 그럼 그 느낌을 길게 느끼고 싶을거 같으니깐."
우리는 모든 겉모습이 거짓이었을 지라도
우리가 공유하고 함께 느꼈던 순간들 만큼은
진심으로 진심으로 간절한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