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fille inconnue
영화 <언노운 걸>
La fille inconnue
글, 박하리
* 어떠한 상업적인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며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담겨져 있고 스포가 있는 글입니다.
내가 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를 때 맨 처음 눈여겨보는 것은 영화 포스터이다. 주로 간결하지만 감각적인 영화의 포스터를 보게 된다. 영화 <언노운 걸>의 포스터는 프랑스 특유의 차가운 색채를 썼고(프랑스를 생각하면 주로 축제 분위기이지만 실제로 가보면 차가운 느낌이 많이 난다고 한다.) 주인공의 옆모습과 간결한 쿨그레이의 글씨체로 된 제목이 적혀 있다. 간결하지만 강력한 힘이 있는 영화라는 이미지였기에 바로 예매를 해 버렸다.
<언노운 걸>이라는 영화를 프랑스어로 바꾸면 La fille inconnue이다. fille는 ‘소녀’라는 뜻이고 inconnue는 ‘무명의, 보잘 것 없는, 낯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unknown(알려지지 않은, 무명의)라는 뜻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단어로 느껴졌다. 특히 ‘보잘 것 없는’이라는 뜻을 고려해보면 말이다.
영화의 포스터는 그것을 고려했는지(혹은 우연찮게) 프랑스어로 LA FILLE INCONNUE라고 가운데에서 살짝 아래에 새겨 넣은 뒤 아래 부분에 ‘언노운 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영화는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시작된다. 다르덴 감독의 <내일을 위한 시간> 또한 그랬다. 일상적인 영화의 속도 속에서 관람객 또한 빠져 들어가 그들이 항상 겪는 일상의 분위기를 영화와 같이 걷다 보니 상업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를 즐겨 보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수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화들 보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희적 충족감 대신 우리의 일상 속 충돌할 수 있는 도덕적 문제, 혹은 삶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강한 빛을 지닌 영화로 느껴졌다.
또한 다르덴 감독이 택하는 여배우들의 특징은 (<내일을 위한 시간> 속 마리옹 꼬띠아르 등) 격렬하고 억지스러운 연기를, 혹은 유희적이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하는 여배우가 아니라 조금은 피곤해보이지만 자신의 역할을 마치 실제 자기 자신처럼 소화해낸다는 점이다. ‘연기 잘 한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연기 아닌 연기를 해 내는 여배우 말이다.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는 주인공 제니다벵이 일하는 병원에서 시작된다. 그곳이 이 영화의 주 무대이다. 다벵은 그곳에서 일하는 인턴 줄리앙에게 말하였다.
“감정도 통제해야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어.”
아무리 이성적이고 판단력이 좋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신이 아닌 이상(만약 신이 있다는 가정 하에) 우리가 감정을 배제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첫 시퀀스에서 나온 그녀의 이미지는 치료와 업무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하고 원칙대로 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 같아 보였다. 차갑고 무뚝뚝한 그런 인물 말이다.
그러다 흑인 아이인 ‘일리아스’는 병원에서 발작을 하게 된다. 다벵은 침착하게 그 아이의 발작을 멈추고자 줄리앙에게 쿠션을 달라고 명령하지만 줄리앙은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다벵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감정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병원의 업무가 끝이 나고 다벵은 줄리앙에게 말을 걸지만 줄리앙은 무시하거나 대충 대답한다. 그 때 벨이 한 번 울린다. 다벵은 줄리앙에게
“열어주지 마. 진료는 마감되었고, 환자들에게 휘둘리지 마. 그리고 다급한 일이었다면 벨을 한 번 누르지 않겠지?”
라고 말한다. 줄리앙은 아무 말 없이 다급히 병원을 빠져나간다.
다음 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흑인 소녀의 시체가 강가 건설 현장에서 발견되고 다벵은 경찰의 전화를 받는다.
CCTV를 돌려 보았을 때 그 소녀는 벨을 누른 당사자였다.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다벵은 눈물을 흘리며 이 사건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그녀의 행동은 이때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 부분,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을 한 그녀이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뒤 그녀는 환자들에게 이타적으로 대하기 시작한다. 조금은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또한 이 영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핸드폰이다. 이 영화에서 핸드폰이라는 소재가 많이 나오는데 ‘기계’라는 소재는 ‘인간애’와 대조를 이룬다. 원리 원칙대로 척척 알아서 해 주는 것이 기계의 특징이지만 그것은 인간애와 감정(정보에 의하여 흉내 내는 감정 말고 마음속에서 나오는 감정)은 없다. 점점 기계화 되어 가는 우리의 삶을 핸드폰에 비유하여 나타낸 것 같이 보였다.
다벵은 흑인 소녀가 죽은 이후로 그녀의 이름을 알기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소녀의 사진을 보여주고 다니기 시작한다. 또한 죄책감으로 인하여 더 좋은 환경인 케네디 센터도 포기하고 동네에 클리닉 센터에 남아있기로 결심한다. 이 소녀의 죽음에서 중요한 것은 다벵에게 있어 범인을 찾아내는 것도, 범인을 찾아 경찰에게 알리는 것도 아닌 그저 그 소녀의 이름을 알아내어 가족들에게 그 소녀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소녀의 이름도 모르는 채로 매장 버린다는 경찰. 다벵은 직접 소녀의 시신을 묻는 것을 의뢰한다.
그녀는 소녀의 죽음의 영문과 이름을 알기 위하여 사이버 카페까지 가게 되었고 여러 남자들에게 욕과 협박을 듣는다.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 고 말이다. 심지어 경찰에게도 그 말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다벵은 무명의 소녀의 이름을 찾는 것을 그만 두지 않는다. 흑인의 이름과 가족조차 모르는,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케네디 센터마저 포기해가며 그녀의 죽은 영혼을 위하여 그녀의 죽음을 찾아나서는 이가 과연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의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소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에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문을 열어주었다면 소녀가 살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그녀 때문에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로 인하여 소녀가 살 수 있을 뻔하였다.’ 라는 가정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녀는 병원 시간의 원칙을 지킨 것일 뿐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그녀의 이름을 찾기 시작한다. 오히려 죄책감을 가져야 할 사람은 소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브라이언의 아버지인데 말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에 바빴다. 뒤바뀐 죄책감에 대한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를 살릴 수 있었던 자와 소녀를 죽음으로 인도했던 자 간의 죄책감 말이다.
다벵이 소녀의 이름을 찾아나서게 된 이후로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자들의 마음 또한 바뀌었다. 그녀 혼자 소녀를 위한 행동이 파생되어 여러 사람의 행동으로 번진 것이다.
영화의 끝 부분에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다벵에게 자신의 행동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다벵에게 말한다.
“나는 이 여자애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다벵은 “나도 그래요.”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다벵은 말한다.
“죽은 소녀가 우리에게 부탁하는 거예요.”
“죽으면 끝이야.” 브라이언의 아버지가 대답한다.
“끝이 아니니까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 아닐까요?” 다벵은 말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같이 보였다. 영화가 진행될수록(다벵이 소녀의 이름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볼수록) 마치 추리 영화를 보는 법 했지만 이 영화의 주목적은 소녀의 이름을 찾아내고 범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 웃음도, 혹은 통쾌한 정답 같은 신도 아닌, ost도 나오지 않고 그저 자동차 소음이 나며 다시 병원에서 할머니를 진료해주는 다벵의 모습이 나온 뒤 끝이 난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도, 혹은 새드엔딩이라고 하기도 무리가 있다.
이 영화를 주의 깊게 본다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는 그리 큰 사건이 아닌 듯 차분하게 대한다. 영화의 대사 중, 어떤 사람이 다벵에게 “당신이 진료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라는 대사가 있는데 사람들은 “오 저런, 안 됐네요.”라고 차분하게 말한 뒤 그저 그 일을 넘어가버린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꽤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어떠한 슬픔이나 혹은 놀라움 없이 그저 지나쳐 버린다.
또한 소녀의 죽음에 대하여 다벵만큼 관심이 있는 인물이 없었다. 브라이언의 아버지나 브라이언은 소녀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감추기에 급급하였고 소녀의 언니 마저 그녀를 모른 척 하였다. 경찰 또한 마약 밀매자들이 당신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다 하며 다벵에게 이 일에서 빠지라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이 내용들과 La fille inconnue(무명의, 보잘 것 없는 소녀)라는 영화 제목이 잘 어울린다. 이 소녀가 흑인이 아니고 백인 소녀에다가 유명인의 딸이었다면 어떠하였을까? 사람들의 반응이 과연 이와 같았을까? 마치 사람에게 가치 평가를 하듯 사람들은 그 소녀의 죽음에 대하여 무관심하다. 감독은 여성의 주인공과 어린 소녀면서 흑인인 아이를 통하여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 같았다.
우리에게 점점 더 부족해져 가는 인간애와 인간성에 대하여 영화는 은유적으로(혹은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지는 인물로 말이다. 어떠한 한 개인이 어떠한 일을 하건, 어떠한 피부색을 가졌건, 어떠한 성을 가졌건, 돈이 많건 적건 가장 기본적으로 그들 또한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가끔 우리는 그것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만 같다. 사람에게 과연 가치평가가 가능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