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이미지에 대한 아주 난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
내가 작업을 할 때 드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작업을 이미지가 보이는 구상 작업으로 진행시킬 것인지 혹은 추상작업으로 진행시킬 것인지, 만약 구상화로 작업을 하겠다고 가정하면 그 이미지를 어디에서 따 올 것인지, 상상 속 이미지를 이용할 것인지 등의 여러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가장 쉬운 것은 작은 드로잉이다. 실상 복잡한 생각 없이,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 없이 내면의 에너지가 가장 적게 들어가는 것이 드로잉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드로잉은 추상 드로잉과 구상 드로잉으로 나뉘는데, 추상작업을 할 때에는 표현 방식이 쉽게 질리기 때문에(내가 그리는 표현 방식이 반복될수록 추상 작업이 다 비슷하게 느껴지므로) 최근에는 주로 구상작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지가 보이는 드로잉을 하다가도 손을 놓아버리고 싶은 경우가 많다. 이미지의 고갈에 있어서 말이다. 내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미지이지만 이미지가 아니다. 이미지라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 모든 이미지들을 다 놓아버리고 싶다.
마를린 뒤마의 작품을 보면 대다수 작품 속에는 인물이 등장한다. 가끔 추상 작업이 있기도 하지만90% 이상의 작업에 인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표현방식이 그리 많은 변화가 있지는 않지만 그녀의 작품은 쉽게 질리지 않는다. 질리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을 마치 이미지로만 생각하여 질리는 것? 그녀의 작품은 이미지로 보이지만 사실상 이미지가 아니다. 깊은 내면과 이미지를 뛰어넘은 다른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직접 경험하고 직접 찍은, 혹은 직접 보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작업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주 딱딱한 아스팔트 속에 끼워진 유동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혹은 표면적으로 혹은 아주 가볍게 혹은 아무런 무게감 없이 느낀 것을 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미지)을 그릴까,에 대한 고민 또한 중요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것이 있지 않을까? 혹은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를린 뒤마는 주로 잡지, 광고 이미지, 혹은 자기 자신, 창녀 등을 그린다. 자신에게 영감이 될 만한 소재를 집어 자기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그린다. 그녀의 그림을 따라 그리려고 그녀의 표현방식만을 베끼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이미지 상으로는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그림 속 인물의 감정 혹은 작품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따라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의 그림은 불확실성처럼 느껴진다. 의도하여 계획한 표현이라기보다는 물감이 흐르는 대로, 그 흘러가는 물감에 표정을 집어넣고, 감각을 집어넣는 듯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작품 속, 인물들의 뒤틀리고 뭉개버리고 흘러내리는 표정 속에서 그들의 눈은 살아있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볼 때 가장 주목하는 점이다. 아주 사실적이거나 디테일하게 그린 눈은 아니지만 인물의 신체 중 여러 부위 중에서 가장 애써서, 가장 공들여 그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의 눈은 살아있다. 생동감 있게 나를 보고 있어 내가 다른 곳을 쳐다볼 때 그 작품 속 인물들의 눈은 나를 비웃으며 눈꺼풀을 깜빡깜빡 할 것 같다. 아주 흔한 말 중, 사람의 눈을 보면 영혼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나 또한 그 말을 믿는다. 사람의 눈을 보면 가끔은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가 보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내면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내면이라는 단어를 혼이라는 단어로 비유해서 부르는 것을 즐긴다.(하지만 영혼 =내면이라는 뜻은 아니고 그저 비유적인 말로 사용한다. 영혼이라는 것은 아주 포괄적인 단어이고 굳이 종교적인 단어는 아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속 특징은 사실적이지 않지만 아주 사실적이다. 오히려 나는 그녀의 그림이 굉장히 담백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가끔 내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여러 꾸며진 색깔들로 인하여 그 그림이 예쁘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그리고 그 색감을 보며 즐기기도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바가 그러한 점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 그것은 이미지란 말인가? 그러면 차라리 장식적인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한 가지의 방식이 될 수도 있지 않는가? 그 장식적인 이미지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장식적인 그림과 이미지가 중점이 아닌 작품 사이의 애매한 곳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내가 추구하는 바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면 그 이미지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다. 분명 나에게 있어 이미지는 중요하지만 최우선순위는 될 수 없으리라.
뒤마의 그림은 이미지를 최우선으로 둔 것이 아닌 그저 표현방법 중 일부분이라고 느껴진다. 그 작가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나는 그녀의 작품이 아주 사실적인 그림이라고 느끼는 까닭은 작품에서 ‘바로 보여 지는 이미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적이고 과격할 수도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많이 없어진 이미지’ 때문이다. 그녀는 정사하는 모습, 오랄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울고 있는 모습, 범죄자처럼 섬뜩하게 웃고 있는 모습 등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아주 담백하다.
양의 기운과 음의 기운이 존재한다면(내가 구분하는 개념의 양과 음이라는 단어이지 일반적인 양과 음이라는 개념이 아닐 수도 있다)양의 기운은 눈으로 바로 보이는 기운처럼 느껴진다. 활기가 넘치고 우뚝 솟아 있다. 음의 기운은 자칫 보면 축 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의 기운 못지않게 생동감이 강하다. 두 개 다 아주 강하게 살아있지만 음의 기운은 안 보이는 곳에서 아주 천천히 생동감이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 위험할 수도, 더 독할 수도 있는 기운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뒤마의 작품 속 느낌이다. 그녀의 작품 속 아우라는 아주 죽어있는 기운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그녀의 작품을 보면 굉장히 살아있는 아우라를 느낀다.
이미지란 무엇일까. 이미지는 분명 중요하다.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미지를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마치 육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육체는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육체가 없다면 정신은 제대로 작용하기 힘들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크게 내세우고 싶지도 않다. 이미지만을 바라보면 이미지만 있다. 이미지는 무엇인가와 '결합'되었으면 한다. 나의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지에만 멈추어 있고 싶지는 않다. 조형적인, 겉보기에서만 고여있고 싶지는 않다. 내가 느끼기에 뒤마의 그림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이미지이지만 그 이미지에서만 멈추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른 힘이 녹아 있다. 아주 사실적이고 적나라하며 가끔은 눈을 찌푸리게 하는 그러한 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