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의 23년형, 그리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by 박지용

어제 한덕수 전 총리의 23년형 선고가 나오고, 어떤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덕수는 그냥 관료로서의 사고가 강한 수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노무현 참여정부 때도 총리를 했던 사람인 만큼 커리어부터가 정치색이 그렇게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판결문에는 계엄령이 성공할 것 같아서 가담했다고 적시하고 있지만, 어쨌든 “수동적으로 따라간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였다.


마침 어제 스레드에 ‘악의 평범성’ 글을 올렸는데,

https://www.threads.com/@qkrjiyong/post/DTxGJOiDwgr?xmt=AQF0V4ltdLPICCE2Mt1d1TX_WDFnbPSuqHtGc3zUHDF8DA

생각해보니 한덕수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꽤 겹치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1:1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핵심개념은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


아이히만은 2차대전 나치독일의 장교였는데, 총을 든 건 아니었고 사무적인 일을 맡았다. 독일 점령지에 있던 유대인들을 폴란드의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이었다. 당시 물류는 거의가 기차로 이루어졌기에, 기차를 배정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수용소로 이송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원로 유대인을 이용해 절멸수용소로 유대인들을 이송했다. 유대인 원로들에겐 유대인들을 폴란드의 살기좋은 곳으로 이주시키겠다고 설명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을 특별히 더 증오한 것 같지는 않지만, 승진 욕심이 컸던 그는 본인이 ‘유대인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가장 효율적으로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상부에 어필했고, 출세를 위해 본인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특별히 컸던 것도 아닌데,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것이다.


나치독일의 패망이 선명해지고, 모든 독일 장군과 정치인들이 본인의 전쟁범죄 관련 문서들을 소각하면서 면피를 하는 동안, 아이히만은 오히려 이런 모습을 비웃었다. “나는 무덤으로 뛰어들며 웃을 것이다.”라며.


아이히만이 유능하긴 했지만 거물급은 아니었는데, 이런 발언들이 입을 거치며 소문이 나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이히만이 나치의 엄청난 거물이었던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독일이 패전하면서 ‘무덤으로 뛰어들겠다’던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정체를 숨기고 살았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아들이 유대인 여친에게 아빠 자랑함) 정체가 노출되고, 이스라엘의 안기부인 모사드가 그의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고 모사드 요원들은 아르헨티나 정부 몰래 아르헨티나로 몰려가서 아이히만을 납치해 이스라엘로 잡아온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시작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한나 아렌트 교수가 The New Yorker의 기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 특파되어 재판 기록을 보고 남긴 내용이다. ‘악의 평범성’으로 알려진 책이지만, 실제 책 내용을 보면 재판 내용에 굉장히 충실한 걸 알 수 있다. (책 사서 읽는 건 강력히 비추. 번역이 너무 엉망임)


참고로 이스라엘 재판정에서 판결을 받은 아이히만은 당연히 사형선고를 받았고 다음 해 사형된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 대상이 유대인일지언정 ‘인류를 대상으로 벌인 범죄’를 이스라엘 법원에서 판결하는 게 옳으냐며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일에서 판결받는 게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보고, 그냥 본인 생각을 책에 남겼을 뿐 1인시위 같은걸 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한덕수가 관료주의적인 수동성으로 윤석열에게 가담한 걸 보면, 아이히만의 banality와 너무 닮아 있다. 윤석열이 계엄령을 내리면 옆에서 강하게 뜯어말려야지, 그걸 그러고 있는 게 맞냐는 말이다.


그래서 한덕수가 아이히만 같다는 내용을 글로 써보면 어떨까, 라고 아내에게 얘기했는데 아내는 강력히 반대했다.


왜냐하면 한덕수를 비판하는 내용이어도 이재명 지지자들은 비판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한덕수를 옹호하는 내용이라 생각해서 거품 물고 악플을 달거라는 이유에서였다. 한덕수가 했던 일들 중에서 실제로 나쁜 행위 사례를 가져와서, 이렇게 나쁜 놈인데 어떻게 수동적인 ‘평범성’을 한덕수에 갖다 붙이느냐며 화낼 거라는 말이다.


사실 아내의 예상은 내가 직접 겪지 않아도 100% 확실하다고 믿는 것이,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으로 비판했던 한나 아렌트도 유대인 사회에서 굉장한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평범한 일일 수 있냐, 아이히만이 무슨 악행을 저질렀는지 몰라서 그러는거냐는 등 격렬한 비난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지적은 철학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낳았고, 아이히만이 착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것 같다. (한나 아렌트는 본인은 철학자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결국 네임드 철학자로 등극했다)


계엄령이 홀로코스트랑 비교할만한 그런거까진 아니지만 계엄령이 계몽령으로 재평가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한덕수도 '평범성'으로 나중에 비슷하게 평가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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