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을 다치며 타고 다녔던 스무 번의 택시 기록
<첫 번째 택시>
“안녕하세요.”
“...”
목발을 짚고 택시를 기다리다 보면,
대부분 말없이 내가 서있는 바로 앞에 뒷문을 대어준다.
“어쩌다 다쳤어요?”
“아, 넘어져서요.”
젊고 키큰 여자애가 왕만한 깁스를 하고 목발까지 짚으며 절뚝대니, 안궁금해하는 사람이 없다.
“몇 주 나왔어요?”
“전치 6주요.”
“젊으니까 금방 낫겠네. 나도 산악자전거를 타는데, 한 번은 리더 따라가다가 넘어져서 갈비뼈랑 다 부러졌어.”
“와, 그런데도 안무서우세요?”
“그거만큼 재밌는 게 없어요. 그니까 계속 타지.”
치유된 아픔은 위안이 된다. 나도 얼른 다시 운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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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택시>
오늘은 엄마가 앞에 타고, 내가 뒤에 탔다.
“안녕하세요.”
“예~ 왼쪽으로 타도 되는데.”
오른쪽으로 빙 돌아서 문을 열고 타면 종종 듣는 말이다. 이러나저러나 불편한 건 비슷하지만 호의 섞인 말이 반갑다.
말없이 가다가,
”아이씨, 저 병x 같은게. 운전을 그따구로 하냐!“
빵- 하는 경적과 함께 기사님이 찰지게 욕을 한다.
사람이 옆에 있는데 저렇게 말할 정도의 성질이면, 아파트 안쪽까지 들어가달라고 하는 건 무리겠다고 생각한다.
“전에도 웬 아줌마가 모는 차가 골목에서 나오는데 나를 확 들이받는거야. 내가 과속을 했대. 참나! 보험회사도 안부르고 경찰서를 가쟤. 근데, 경찰서까지 가면 무조건 진 사람이 딱지 끊어야 되거든. 내가 과속이라는 걸 누가 믿어줘? 그 아줌마만 딱지 끊었지 뭐... 근데, 커피 왜 안마셔요? 마셔도 되는데.“
엄마가 테이크아웃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꼭 쥐고만 있으니 기사님이 묻는다.
“아, 제꺼라서요.”
“손 시렵겠구만. 여기 홀더에 넣어놔요.”
호의를 거절하는 법이 없는 엄마는 순순히 홀더에 커피를 꽂는다. 갑자기 여행가는 기분의 풍경.
“다리도 아픈데, 안쪽까지 들어가 드릴게.“
”감사합니다.“
”예 다왔습니다. 커피 챙기고!”
그래, 친절과 성질(욕)은 한 사람이 동시에 소유하기에 그리 이상한 조합은 아닐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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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한 번째 택시>
비가 오는 날,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야 했다.
폭우주의보가 뜰 줄 모르고 티켓 취소 기한을 놓친 거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어린이날이었다.
택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고,
20분의 호출-취소 사투 끝에 드디어 콜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발과 우산을 동시에 컨트롤하느라 걸음이 매우 느렸는데,
택시는 이미 도착해있었다.
허둥지둥 가려는데 앞문이 달칵 열리더니,
“콜 부르셨죠? 천천히 오세요.“
그 한마디가 어찌나 반갑던지.
기사님은 내가 탈 뒷문 앞에 우산도 없이 보디가드처럼 서서 기다려주셨다.
‘비 다 맞으실텐데...’
“우산 잡아드릴게요. 천천히 타십시오.“
그 친절에 마음이 녹아, 가는 길에 기사님이 쉴새없이 말을 시켜도 다 받아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사님은 말 한 마디 없이 평화로운 주행을 하셨고 (이것마저 완벽했다) 대학로까지 긴 침묵 끝에 꺼내신 말은 이것이었다.
“차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요.”
“아니에요, 여기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주시면 조금 걸어갈게요.”
“예. 그럼 빨리 쾌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기사님은 내릴 때까지 우산을 씌워주셨고, 그 친절에 생전 한번도 남기지 않던 택시어플 리뷰를 기꺼이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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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그렇다.
식당이나 미용실처럼 재방문하지 않는다.
20분 내외의 짧은 시간 가장 우연적으로 만나고,
그만큼 ‘목적지까지의 이동’이라는 기본적인 서비스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우리의 짧은 만남에 있음을, 다음 택시를 탈 때도 어쩐지 기대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