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우연 예찬론자로서, 우연이 인생에 얼마나 감칠맛을 더해주는 재료인지에 대해 적어보려 합니다.
기차를 놓쳐본 적이 있으신가요? 광주에 계시는 선생님을 오랜만에 뵈러 내려가는 표였습니다. 원하는 시간대를 끊기위해 2주 전부터, 알람까지 맞춰가며 손에 얻은 티켓이었죠. 어쩐지 기차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시간도 30분이나 여유가 있었어요. 용산역에 도착해 근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차 여행의 무드를 즐기기 위한 예열을 할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시키고, 출발 15분 전 플랫폼 넘버가 뜨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웬걸, 전광판을 아무리 찾아봐도 광주로 가는 기차가 없는 거예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었습니다. 내가 발딛고 서있는 곳은 용산역이 아니라 서울역 스타벅스였다는 걸. 어떻게 그걸 헷갈릴 수 있지? 자기책망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택시를 탔지만 15분 안에 서울역 플랫폼에 도착하는 건 물리적으로 무리였죠. 택시비도 날리고 기차도 날린, 털레털레한 바보가 되어 서울역에서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다행히 바로 다음 기차의 입석표를 겨우 얻을 수 있었습니다. 6월말, 에어컨도 없는 복도 자리는 찜통이었어요. 계획한 것은 웬만하면 지켜야 하는 파워J(계획형 인간)였기에, 기차 낭만이라도 주섬주섬 챙기기 위해 배낭에서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런 구절이 나오더라고요.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여행에 있어 우연의 역할은 더 각별하다. ... 이런 우연 없이 예측 가능한 대로만 시간이 흘러간다면 그 여행은 빛을 잃는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생각해보면 예측가능한 것들은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여행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일정을 짤 때 참고한 블로그나 브이로그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상상으로만 여행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우연한 사건은 마치 평점을 모르고 들어간 미슐랭 3스타 맛집 같습니다. 부드러운 우유맛 아이스크림 속 팝핑 캔디 같아요. 지난주에 모네 그림을 보러 도쿄 여행을 떠났는데요. 하필 미술관이 긴 휴관을 맞은 주였죠. 닫힌 철창문을 보니 어찌나 절망스럽던지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왔는데 운도 참 없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검색해서 대안으로 간 아티존 미술관에서, 예상치 못하게 또다른 모네 그림을 볼 수 있었어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만나게 되니 길에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조금은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요. 사람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바른 대로 돌아간다는 뜻의 사필귀정은 흔하게들 쓰는 말이지만, 사실 그 뒤에 따라오는 '거자필반' 때문에 이 말을 좋아합니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불계의 말입니다.
잠을 자려고 눕거나 일기를 쓸 때면, 애써도 잘 되지 않았던 관계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모난 나의 성격 탓이든 상황의 탓이든, 자석의 N과 S극처럼 붙으려고 애쓸수록 멀어졌던 사람들이요. 관계의 끝매듭이 아쉬워 멀티버스처럼 생각이 경우의 수를 새끼치며 뻗어가곤 합니다. 그럴때면 거자필반을 읊조립니다. 애쓰지 않더라도 우연이라는 감독이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며 말이죠. 여느 때와 같은 주말 낮 동네의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취향이 비슷한 영화가 개봉한다면 옆자리에서 만날 수도 있으려나요.
파워J이지만, 애매하게 지키지 못할 계획을 세울 바에는 무계획으로 여행을 갑니다. 무계획이 계획이랄까요? 계획이 없는 것보다도 틀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진정한 J(계획형 인간)라는 말에 백 번 천 번 공감하거든요. 우연에게 키를 맡기면 그 자체로 완벽한 계획이 됩니다.
"작정하고 찾아간 박물관이 긴급 보수 공사로 문을 닫는 우연, 예매 시간을 착각해 기차를 놓치고 버스를 탈 우연, 버스 옆자리에 앉은 이와 서로의 영화 취향에 대해 신명나게 떠들 우연..." - <리스본행 야간열차>
모든 경우의 수를 뚫고 일어난 오늘의 각본 외 사건을, 하루의 끝에 일기장에 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신명이 납니다. 어떤 우연이든 기꺼이 맞이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