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30대라면, 어릴적 한번쯤은 피아노 학원을 다녀봤을 것이다. 나도 초등학생 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셨다. 하지만 어릴적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매우 힘들었던 기억밖에 없다. 먼저 피아노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다. 악보를 잘 읽지 못해서 엉뚱한 건반을 누르기라도 하면 선생님은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냐?!”라며 호통을 치셨다. 어떤 날은 자로 손등을 내리치며 혼내기도 하셨다.
나는 피아노 선생님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연습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한참 늦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이 나의 레슨 진도를 앞질러 가게 되었다. 그러자 나는 ‘아,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어’라고 생각하며 피아노 앞에서 시간만 떼웠다. 피아노 학원에서 만화책만 보다가 집으로 오는 날이 더 많았다. 그 때에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보다, 친구들과 밖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며 뛰어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다. 그 친구는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취미 삼아 작곡한 곡이 노트로 몇 권이나 되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생각하며 작사, 작곡했다는 곡을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노래해 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아 쓴 가사로 노래한다는 것. 이보다 더 로맨틱한 이벤트가 있을까. 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나는 그의 가치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남자가 뭔 피아노냐’며 마음에 없는 소리만 했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 그는 다른 사람의 배우자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준 그 친구에게 정말 감사하다.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 어느새 나는 30대가 되었다. 그러자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피아노 연주로 내가 먼저 프로포즈 해야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나는 피아노를 못 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작년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목표는 피아노 연주곡 한 곡을 마스터하는 것이다. 목표 기간은 1년으로 잡았다. 20년 만에 다시 피아노를 배우려니 악보를 읽는 것부터 시간이 꽤 걸렸다. 이제 막 구구단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이들은 2X1=2, 2X2=4, 2X3=6, 2X4=8 이렇게 구구단을 순서대로 외우면서 숫자를 헤아린다. 같은 방법으로, 나는 오선지에 있는 음표 하나를 읽기 위해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이렇게 순서대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익혀야 했다.
나는 딱 1곡만이라도 피아노를 멋지게 연주하고 싶었다. 목표가 있었기에, 피아노 연습시간은 재미있었다. 악보를 읽는 것이 서툴러서 진도가 안 나갈 때는 연습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날은 몇 시간 동안 같은 마디를 수백 번 반복해 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피아노를 배우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다. 피아노 치기는 악보를 손가락으로 표현하는 ‘신체운동’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수영을 처음 배웠을 때를 생각하면, 물 속에서 숨을 내쉬는 것 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도 팔 동작, 다리 동작도 동시에 생각하면서 연습해야 한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통제가 안 된다. 하지만 같은 동작을 수차례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수영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피아노 치기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악보를 눈으로 읽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오른손 손가락 5개, 왼손 손가락 5개가 각기 움직이며 악보에 있는 건반을 정확히 눌러야 한다. 처음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도 계속 연습 하다보면 조금씩 익숙해진다.
연습을 반복 하다보니, 악보를 외우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유튜브 동영상으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곤 피아니스트의 연주 테크닉과 감정표현을 따라 해 보았다. 피아노를 치는 시간 만큼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그 때의 나의 연습광경을 지켜보았다면, 내 모습은 꽤 우스꽝스러웠을지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몇 달 동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연습했다.
해가 바뀌었다. 올해 나는 오피스텔로 이사를 왔다. 집들이를 열어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와 친구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들이 방 한 켠에 있는 전자키보드를 보고선 연주를 요청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지난 몇 달 동안 연습했던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순간 나의 작은 오피스텔은 연주회장이 되었다. 연주회장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악보조차 읽지 못했던 내가 어느새 모차르트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지게.
10분 동안 이어진 피아노 멜로디에 친구들은 행복해했다. 나는 이 짧은 10분을 위해서, 100시간이 넘는 연습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해냈다.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작곡법을 배우고 있다. 이왕이면 멋진 그랜드피아노로 연주하며 프러포즈할 그 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