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강남구청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어느 시민의 즉석 질문이었다.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맨 앞자리에서 질문을 하던 분의 목소리는 정확하게 들렸다. 강단 위에서 시민의 질문을 받은 작가는 청와대 연설비서관 출신이자 <대통령의 글쓰기>를 출간하면서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졌다. 나는 이 작가님이 책을 출간하기 이전에 팟캐스트 방송에서 먼저 본 적이 있었다.
그 날은 퇴근 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에 강남구청 앞을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버스 정류장을 조금 못 가서 익숙한 작가의 이름이 내걸린 현수막이 눈에 붙잡혔다. 진솔하고 위트 있는 입담에 반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터였다. <강원국 작가 초청 북콘서트>. 서점에서 출간된 작가님의 책을 보긴 했지만 북콘서트를 하는지는 몰랐는데. 그런데, 어라? 행사일이 오늘이잖아?!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강남구청으로 향했다.
북콘서트의 주제는 글쓰기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글쓰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작가이자 위트 있는 입담을 지닌 유명인(?)을 실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북콘서트에서 작가님은 자신의 성장과정과 더불어 지금까지 글을 써온 방법들을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독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첫 시작이 힘들다고 토로한 어느 시민의 질문. 이것에 대한 작가님의 답변이 흥미로웠다.
글 쓰기 전에 하는 습관을 만들어 보세요.
내 기억이 맞다면, 작가님은 많은 전업작가들이 글을 쓰기 전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 있다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글을 쓰기 전 행하는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일정한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뇌가 글을 쓸 수 있도록 유도하는 준비운동 같은 것이라고 했다. 참고로 그 날 북콘서트주인공이었던 작가님은 글을 쓰기 전 안경을 닦는다고 했다. 안경을 계속 닦다 보면 글을 쓰고 싶은 지점이 생긴다고.
참 재미있는 습관을 갖고 계신 분이다. 안경을 닦고, 닦고, 글감이 생각날 때까지 또 닦는다니. 작가님의 안경알은 늘 깨끗하겠군요.
나는 올해 브런치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글을 쓸 때마다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겨우 몇 개의 글을 써내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글감을 찾느라고 며칠 동안 고민을 할 때도 있다. 빈약한 어휘력이 창피하기만 하다. 오늘도 노트북 한글파일에서 깜박이는 커서만 두 시간째 보고 있다. 안돼. 언제까지 이렇게 멍청하게만 있을 순 없어. 나 정말 글을 쓰고 싶다고요. 도와주세요. 제발.
그런데 오늘에서야 문득 생각이 났다. 일 년이 훨씬 지났지만 북콘서트에서 독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했던 작가님이 답변 말이다. 그때 질문을 했던 그 시민의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같았을까.
좋아. 그렇다면 나도 말이야. 글쓰기 전에, 내 머릿속에 있는 뇌에게 준비운동을 시켜 주겠어. 뇌가 지금은 글을 쓰지 않으려고 이토록 반항하고 있지만 말이야. 글을 쓰지 않으려고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지만 특정한 습관을 계속 들이다 보면 언젠가는 뇌도 나에게 굴복하겠지. 내 몸의 주인인 나에게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뇌가 잠재되어 있는 나의 창의력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줄지도 몰라. 어쩌면 출간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럼 어떤 습관이 좋을까? 음... 산책도 좋지만 늦은 밤에 여자 혼자 걷는 건 위험해. 안경닦이는 쉬워 보이지만 왠지 금방 지루해질 것만 같아. 재밌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동시에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였으면 좋겠어. 나는 책상을 두리번거렸다. 재작년에 한 인권단체에 후원을 하면서 기념으로 받았던 연필 몇 자루가 보였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빠는 틈날 때마다 필통 안에 있던 연필을 보시곤 손수 깎아 주셨다. 집에 연필깎이 기계가 있는데도 굳이 커터칼을 쥐고서 연필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시는 것이다. 사각사각사각. 연필 나무껍질과 흑연이 깎여나가는 소리가 좋았다.
아빠가 깎아주신 연필은 연필심이 적당히 예리했다. 기계식 연필깎이의 손잡이를 돌려 단 몇 초 만에 깎아낸 연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연필깎이 기계를 사용하면 연필심이 너무 뾰족해서 간혹 손에 찔리기도 했지만 아빠가 깎아준 연필은 그럴 일이 없었다. 적당히 날카롭고 적당히 부드러웠다. 모양새도 훌륭했다. 내 손 크기와 연필을 쥐는 파지법에 딱 알맞았다. 이 연필로 숙제를 하면 글씨가 더 이쁘게 써지는 것만 같았다.
좋아. 이거야. 연필을 깎아봐야지.
요즘 연필을 직접 깎아서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나. 4B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미대생이면 모를까. 연필을 깎아본 적이 몇 번 없으니 처음엔 서툴 수밖에 없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하구먼.
먼저 연필을 깎을 때는 커터칼의 칼날을 너무 길게 빼서도 안 되고 짧게 빼서도 안 된다. 내 짧은 경험에 의하면 대략 5cm 정도가 적당하다. 왼손으로 연필을 쥐고 오른손으로 커터칼의 칼날을 연필 위에 사선으로 댄다. 자, 지금부터가 중요한데 커터날과 연필이 맞닿는 각도에 따라 깎여지는 연필의 모양이 결정된다. 따라서 칼날을 너무 세워서도 안 되고 너무 눕혀서도 안 된다. 적당한 각도로 비스듬히 댄 칼등에 왼손 엄지손을 올려 칼날을 밀어낸다. 일정한 힘과 각도를 끝까지 유지해야 핸다. 한 껍질 깎아낼 때마다 연필을 조금씩 돌려가며 깎아낸다. 연필의 외형이 전체적으로 균형 잡힐 수 있도록 한 겹 한 겹 집중해서 깎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연필을 깎는 목적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준비운동 일환으로 연필을 깎고 있었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연필 대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연필을 깎는 그 행위 자체에 너무 심취해서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주의하자. 이제는 천천히 글감을 떠올려보자. 경건한 마음으로.
요즘 내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세상과 나 사이에 엮여있는 관계이다. 인류는 문명이 시작된 이후부터 끊임없이 자아와 세상, 그리고 자아와 세상 사이에 일어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노력해왔다. 우리가 인지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을 의식하고 있는 자아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그려낸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허무맹랑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기원전 인도 베다에서부터 동양철학과 불교에서 같은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근대 서양철학자 칸드의 관념론도 같은 맥락을 하고 있다. 현대 양자물리학을 이해하려면 위에 나열한 일원론적인 철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우주는 나의 상상 안에 있다.
연필 세 자루가 깎였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상하는 것이다. 나는 멀지 않은 미래에 소설 작가가 된 모습을 그려본다. 독자에서 저자로 위치가 바뀐 것이다. 내 이름이 또렷이 새겨진 개인 저서가 출간되었다.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내 소설을 좋아해 주신다. 여러 곳으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 어쩌다 보니 북콘서트도 열었다. 독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을 해주신 독자분께는 정성스럽게 사인을 해 드려야지. 아, 사인을 해 드릴 때는 이왕이면 멋진 몽블랑 만년필이 좋겠다. 우선 책의 첫 페이지 상단에 독자님의 이름부터 써드리고. 이를 테면 이런 식으로 말이다.
Dear OO님. 인생의 걷는 순간마다 행복한 이야기가 깃들기를.
하하. 내가 출간한 작가라니. 흐뭇한 상상에 입꼬리가 꿈틀꿈틀 올라간다. 혼자 피식피식 웃는다. 즐거운 상상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연필을 깎는다. 신문지 위에 깎아낸 연필 부스러기와 흑연이 수북이 쌓였다. 잘 깎은 연필을 가지런히 정돈해 두니 기분이 좋다. 벌써 뿌듯하다. 전에 없던 용기가 생긴다. 뭔가를 쓰고 싶어 진다.
우리는 TV와 유튜브를 끄고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다. 산책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안경을 닦을 수도 있고 샤워를 할 수도 있다. 나는 연필을 깎는 것을 시도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다.
궁금하다. 그대도 글을 쓰기 전에 행하는 습관이 있는지. 있다면 나와 다른 어떤 습관이 있는지 들려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