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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ug 09. 2020

나는 '나'의 팬이 되기로 했다

명상을 통해 나다움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나의 작은 오피스텔에는 내가 스무 살 때부터 읽어온 자기 계발서가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이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들은 대략 이렇다. 큰 목표를 가져라. 벼랑 끝에 자신을 세워라. 실패에 굴복하지 마라. 꿈에 미쳐라. 죽을힘을 다해 살아라. 빨리 부자가 되어라.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책들이 나를 향해 한 입 모아 훈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직접 고르고 골라 읽었던 책인데, 이제와 불편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 분명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  내가 처음 접했던 자기 계발서는 힐러리 클린턴을 모델로 한 책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 책을 읽고 난 후 그녀의 삶을 동경했다. 나도 그녀처럼 멋지고 강한 여성이 되는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 읽은 자기 계발서들은 직장생활에서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흙수저 인생에서 자수성가했다거나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나 또한 성공과 부유한 삶을 꿈꾸는 욕망으로 이러한 부류의 책과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자기 계발서나 스타강사의 강연에서조차 말해주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속에 그들의 이야기는 넘쳐 나지만 정작 ‘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는 것이다.






 30대가 되면서 조금씩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 누구의 삶도 결코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멘토로 여겼던 정치인의 삶은 과연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젊은 나이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청년 사업가의 모습은 정말 내가 꿈꾸는 인생일까? 화려한 톱스타의 삶은 또 어떤가.

 

 나는 질문했다.

‘그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 거지?'


 이 단순한 질문. 나로 하여금 매일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이었다. 명상을 하기전에 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말과 생각을 따라 하기에 급급했다. 고가의 강연료도 아깝지 않았다. 나도 머지않아 그들의 모습처럼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봤다. 만약,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닮으려고만 한다면 과연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동력이 되었던 감정 가운데 제일 센 것은 호기심이었다. 겪어보지 못한 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었고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고 시작한다는 것은 늘 흥미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열정이 많다고 한다. 꿈이 많은 소녀 같다고 말해주는 이도 있었다. 아는 것도 많고 재능도 많다면서 말이다. 내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나는 무엇이든지 배우고 익히는 것에는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게다가 뭐든지 곧잘 하곤 한다. 다만 끈기가 부족한 탓에 석 달을 채 못 간다는 것이 함정이긴 하지만.

  나의 스케줄은 언제나 꽉꽉 차 있었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각종 동호회나 세미나같은 소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늘 바쁜 친구였다. 혹 계획했던 일정이 취소라도 되면 또 다른 일정을 기어코 만들어냈다.






 내 삶에서 명상이 가져온 긍정적인 변화 중 첫 번째는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내가 삶에서 끊임없이 재미있고 삶에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을 강박적으로 찾아헤맷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명상을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날도 잠자리 들기 직전에 단전을 의식하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면서 깊이 호흡을 하고 있었다. 불현듯 20년도 더 된 일이어서 잊고 있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깊은 새벽이었다. 엄마가 황급히 내 방에 달려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바다에 나갔던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다고. 나는 엄마가 그렇게까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겁이 났다.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바다에 나갔던 아빠는 다신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했다.

 명상은 나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내면의 상처를 마주 보게 했다. 몸은 자라났지만 내 마음 저 깊은 곳에는 그날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바다로 나서는 아빠를 현관문에서 해맑게 배웅하는 내가 보였다. 그것이 아빠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 채.

 결국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오랫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폭발해 버렸다. 그렇게 나는 내면의 나와 만났다. 지난날, 아빠가 부재한 상황에서 내가 맏이라는 사실이 책임감과 부담감, 동시에 죄책감으로 덧입혀졌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내색할 순 없었다. 다만 내 마음속에는 소중한 것을 언젠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암감과 공허함이 자리 잡게 되었다.


 명상을 통해 마주한 나는 어떤 불안감 때문에 삶에 자극이 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몰입을 하고 재미를 느끼다 보면 잠시나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불안한 마음은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자꾸만 새로운 것을 갈구하면서.

  수없이 많은 취미생활을 하고 각종 동호회 생활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직장을 박차고 나왔을 때도 그랬고, 서울 생활을 뒤로한 채 갑자기 강원도 시골 마을로 들어갔을 때도 그랬다. 봉사단체 단원이 되었을 때조차 사실은 나의 불안감으로부터의 도피였다.






 명상이 내 삶에 가져온 또 다른 변화는 익숙해져 있던 일상에서 발견한 소소한 '행복'이었다. 내 책상 위에는 집들이 선물로 받았던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화분에서 조그만 새싹이 돋아나 있는 게 아닌가. 연둣빛으로 세상을 향해 빼꼼 내민 얼굴이 어찌나 기특해 보이는지. 자신의 존재를 있는 힘껏 외쳐 보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조그만 새싹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작은 몸짓으로 자신의 커다란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명상은 일상 속에서 무뎌져 있던 나의 감정을 일깨우고 되새기게 했다. 이제는 나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불안감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구태여 새로운 만남이나 자극을 찾으려 헤매지 않아도 괜찮았다. 대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되돌아보며 토닥여 주었다. 나는 그동안 익숙한 것들을 너무 소홀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한 오늘도, 사실은 알고 보면 내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새로운 하루인데.






 나는 긴 명상을 통해 해묵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렇게 내렸다.

'그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다면, 정답은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나의 삶의 목표를 훌륭하거나 성공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나답게 사는 것으로 항로를 변경했다. 나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들을 찾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세상의 기준이나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 내가 진짜 행복을 느끼는 것 말이다.


 나는 오늘도 명상을 한다. 내면으로 눈을 돌려 내가 진짜 행복을 느끼는 것을 찾기 위해서.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실망하진 않으련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어루만져보고, 귀 기울여보고, 의미를 입히다 보면 언젠가 ‘아! 이거야’ 하면서 내 안의 육감이 내가 진짜 원하고 행복을 느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때가 오겠지.

 그래서, 나는 '나'의 팬이 되기로 했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의 내면의 모습과 소통하는 열렬한 팬이 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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