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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는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11살 어린 직원이 내게 물었다.

by 한지예

저마다 기준선이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그 이상을 침범할 경우 우리는 선을 넘는다고 말한다.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기준이 다를 수 있지만, 선을 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 그것도 회사라면 더더욱 말이다.


"오늘부터 우리 친구 하자."


라고 말하듯 갑자기 훅 들어오는 사람이 불편하다.


내 감정과 달리 노력하는 모습을 정당화하는 상대방의 행동 때문에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친구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는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편하지 않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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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있는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던 A는 나보다 11살 어린 직원이었다. 예쁘고 말이 별로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나와 일적으로 대화를 나눌 일이 없어서 나이 말고 A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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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A를 만났다. 나와 가는 방향이 같아 그날은 함께 갔다. 가는 길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지만, 관심사가 달라 깊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퇴근하고 뭘 하는지,

오늘은 뭘 할 건지,


이런저런 의미 없는 대화 중에 A가 내게 물었다.


팀장님, 혹시 퇴근 후에는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했고, A에게 물었다.


응? 왜?


A는 다시 말했다.


언니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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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친한 동료였다면 그래.라고 했을 거다. 이전에 관둔 회사 동료들에게도 관두면 무슨 팀장이야~ 언니지~ 그냥 언니라고 불러~라고 했던 적이 있던 나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평소 인사 외에 대화를 한두 마디 할까, 말까 할 정도로 어색한 사이였던 A가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A는 다소 실망했지만, 마침 나는 내려야 해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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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A와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어느 날 관둔다는 소식을 들었다.


A가 관둔다고 했을 때, A의 이력서를 찾아봤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는 A의 말이 떠올랐고,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관둔다고 했기 때문에 궁금했다.


이력서를 보고 난 뒤 A를 불러서 말했다.


다음 회사에 이력서 쓸 때 이렇게 적지 마.

희망연봉은 정말 희망연봉이야.

터무니없는 연봉은 안 되겠지만, 최저임금보다 낮은 연봉은 쓰지 마.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4곳을 옮긴 건 자랑이 아니야. (...)


A는 내 이야기를 듣고 이력서를 다듬었고, 내 전 직장으로 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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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내가 다닌 전 직장으로 이직했다는 건 출근하자마자 전해 들었다. 나와 친한 동료 C가 바로 알려줬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이력서는 고쳤나.


궁금하던 찰나 C는 A가 회사에서 얼마나 일했는지 물었고, 나는 2개월, 3개월 정도라고 말했다.


C는 6개월이 아니라?라고 물었고, 나는 응, 그냥 모른 척해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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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A 소식은 궁금하지 않았다. 내가 아끼던 직원도 아니었고,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어서 C가 A에 대해 말해도 그냥 듣고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C가 물었다.


A랑 친했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나를 오랫동안 지켜본 C는 내 성향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면접 때 A가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의문이 생겨 내게 물었다고 했다.


A랑? 별로.. 인사 외에 몇 마디 했나 모르겠네.


C는 말했다.


A가 네가 일 알려줄 때 화내고 짜증 부린다고 했다던데.

성격 정말 별로라고.

욕하면서 혼자 버럭 화낸다고 하던데?


누가 그런 말을 하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C는 A라고 말했다.


나는 C에게 말했다.


A가 예전에 내게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근데 내가 그냥 웃고 말았어.

그 후 대화는 나눈 적 없는데

관둔다고 해서 이력서 쓸 때 팁을 좀 줬어.

희망연봉이나 회사 기간 등

그 외에 걔랑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내가 일을 시킨 게 없는데 뭘 알려줬다는 거지..?


C는 내 말을 듣곤, A를 면접 보고 신난 그녀가 C에게 말한 이야기를 알려줬다.


한팀장이 역시 이상한 게 맞나 봐요~

다른 애들한테 화내고, 짜증 부리고.

자기만 잘난 줄 알고!!

A도 한팀장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네요.


그녀는 C에게 A와 면접 볼 때 상황도 함께 전했다.


내가 곁을 주지 않아 상처받은 그녀가 A를 면접 봤다. A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내가 이직한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가 나를 아냐고 물었고, 이상하지 않냐고 질문했다고 한다.


A는 나와 부딪칠 일은 없었지만,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는 말에 대답하지 않아 상처받은 것과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나를 같이 욕한 것이다.


C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내게 확인했고, 나는 실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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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C는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말을 아끼고 아무것도 안 해도 욕을 먹다 보니까 이제는 장수할 일만 남은 거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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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일에 날카롭게 반응하고 싶지 않아.



회사생활을 하면서 인간관계의 염증을 느낄 때가 많다.


그때마다 화르르륵 불타오르고 부들부들 떨면서 감정을 밑바닥 구렁텅이로 몰아봤자 결국 내 손해다.


그들은 내 감정에 관심 없다. 오히려 내가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하 호호 웃고 즐길 것이다.


그런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제 그만 좀 해.

나 정말 너무 힘들어.

나 정말 지쳤다고.


라고 소리쳐봤자 돌아오는 건 위로나 사과가 아닌, 비아냥과 조롱이다.


차라리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아무렇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그들의 관심이 내게 쏠릴 때마다 더 신나게 웃고, 즐겁게 지냈다.


기대도 없던 이들의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고,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실망하면 지는 것만 같았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그저 그런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했다.


저런 사람들처럼 늙지 말아야지.

남을 헐뜯고 비난할 시간에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돼야지.

좋은 사람 중에 더 좋은 사람이 돼야지.


상사나 동료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해서 약해질 필요 없다.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다.


다만,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는 그들의 열망에 보답하듯 절망의 심연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내가 잘못한 걸까.

내가 잘못된 걸까.


계속 곱씹고 책망하면서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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