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기록
최근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를 들여다보고 있다. 구입은 필사라는 주제였는데, 한 가지를 진득하게 못하지만, 글쓰기는 매일 지켰다는 유선경 작가님의 소개말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관심사는 바뀌지만, 글쓰기라는 본질은 계속 가지고 간다는 내 고집(감정적인 면)을 대입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끌리는 것일테다.
(그리고 이런 공감선으로 끌리는거구나, 직접 겪고 배우고 새기는 편이구나 또 생각)
이렇듯 '내가 왜'에 대해서도 나는 나 스스로를 끊임없이 분석한다. 꼬리의, 꼬리를, 물고, 물고, 물고 ...
우연히 펼쳤던 2024년 10월 3일의 문장은 <은희경, 새의 선물>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데 지금은 어떤 이야기였더라? 생각이 나질 않는다. 대부분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좋은 기억은 재밌다, 즐겁다, 보다는 문장이 기가 막혔지. 이걸 이렇게 담는다고? 감탄에 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20대 때는 책을 구입하면 어디서, 누구와 함께 했는지 여백에 짧게 남기곤 했었는데. 새의 선물은 오늘부터 17년 전, 2007년 10월 3일 수요일에 코엑스 반디 앤 루니스에서 구입했다. 이런 우연이! 10월 3일에 펼친 이 문장과 나에게 또 다른 지혜를 주기 위해 내게 '던져진 문장'이 아닐까?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우연은 놀라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자세가 된다.
한 때 은희경 작가님에게 빠졌던 때가 있다. 시작은 새의 선물이였던가? 아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였을 수도 있다. 단편인지, 장편인지, 어떤 이야기와 문장으로 시작했겠지. 감정의 혼돈을 겪던 한창 사춘기의 청소년을 잡아끌었던 것은 당시의 내가 갖고 있었던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서 멀리서 보고 있었던 그 시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집중해도 합당하게 여겨지는 그 시절, 나는 나를 분리하는 법을 배웠다. 내가 속으로
피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던 때도 내 모습을 보고 있는 내가 떠오른다. 내가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다. 대부분 나는 나를 정면으로 보는 것보다 뒤를 보고, 마음을 보고, 행동을 보는 것으로 나를 외면하곤 했다. 그게 나는 나를 견디는 방식이였고.
나는 지금도 혐오감과 증오,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극복의 대상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곤 한다. (...) 그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직시하는 고통만큼은 아직 극복하지 못해서. 지금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는 곱씹고, 외면하는 데 익숙하다. 나는 나를 분리했지만 그 고통만큼은 결국 분리하지 못했다. 육체에 가느다랗고 진득한 실을 연결해서 부진하게 끌고 다니는 귀신같은 나.
하지만 돌이켜보면 불과 몇 달 전에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남자와 마주앉아 있었다.
나의 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보던 시절. 오롯이 나 개인에 몰입해서 살던 시절에 이미 통찰은
갖췄어야했나. 가족이라는 말은 나를 지극히 주관적이고 의무적인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것에 푹 빠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내 삶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나 자신을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본다. '보여지는 나'에게 내 삶을 이끌어가게 하면서 '바라보는 나'가 그것을 보도록 만든다. 이렇게 내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20년도 훨씬 더 된 습관이다.
그러므로 내 삶은 삶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만 지탱돼왔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한다.
삶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배우고 싶었던 때다. 나는 나를 분리했지만 그것을 완성시키진 못했으므로.
'보여지는 나'는 '페르소나'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로 살아간다. 그것이 삶인가, 하루를 바쁘게 열어야하는 10월 3일 배부른 문장을 적고 있네. 진지함에 이렇게 초를 치는 것 또한 하나의 습관이다. 하나를 생각하고, 통찰이 아닌 분해를 하고, 끌고 가고..
나는 어차피 호의적이지 않은 내 삶에 집착하면 할수록 상처의 내압을 견디지 못하리란 것을 알았다.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 과연 용감한 삶일것인가. 대부분은 감정의 격동을 거치고나면 그 시끄러움은 외부로 표출하는 것보다는 내면으로 갈무리를 하고 살아가게 된다. 잊은 것인가, 시간은 덮을 수 있는 것이던가. 나는 여전히 10대의 어떤 일들이 또 다시 벌어지진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상처를 덮어가는 일로 삶이 이어진다
내 삶의 에필로그는 어떻게 맺을것인가.
오늘의 프롤로그는 감상에 취해 필사를 멋지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으나, 휴일이라 기가 막히게 일찍 일어난 아이들과 소란스러움이 끼어든다. 엄마라는 이유로 웃으면서 다가오는 이 아이들도 나는 분석하고,
분해해본다.
왜? 를 달고 사는 아이들과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미리 겪었고 아이들은 이제 겪이 시작하는 것 뿐이다.
눈곱이 붙어있는 눈을 곱게 접으면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호의가 이제는 당연하지만, 아직도 의구심이 든다. 나는 내 엄마에게 어떤 감정을 지금 갖고 살던가?
이 글의 마무리는 이렇게 싱겁게 끝이 난다. 아, 진지한 삶을 살고 싶다면 조금 더 일찍 일어나는 게 나에게 맞는 삶이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