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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21. 2022

혹시 나도, 번아웃?

자기 계발과 번아웃 사이

알차고 생산적인 삶을 살고 싶은 김사원.


그는 항상 바쁜 출근길에서도 틈틈이 영어공부를 합니다. 건강을 위해 점심시간에는 샐러드, 퇴근 후에는 헬스를 해요. 주말에는 학원에 나가고, 승진을 위해 꼭 필요한 자격증 준비도 잊지 않죠.


그런데 우리 김사원, 쉴 틈 없이 알차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밤만 되면 하루가 허무해질까요?


뭘 더 해야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죠?




철학자 한병철은 저작「피로사회」에서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를테면 강력한 권위로 무장한 산업화 시대의 질병은 인간성 말살과 억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가 가진 고유한 질병은 과연 무엇일까요?


「피로사회」에 따르면 21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질병은 바로 '긍정성 과잉'입니다. 과잉 긍정에서 비롯된 과잉 활동과 자기 착취, 흔히들 이를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곤 해요.


바로 우리 사회 속의 수많은 '김사원'들이 앓고 있는 병이죠.





"I can do it, you can do it, we can do it!"


이종필 감독의 영화「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에서 어느 젊은 회사원들이 힘차게 외치는 슬로건입니다. 


'할 수 있다'로 대표되는 이 긍정 신화는 지금까지 우리 공동체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 됐어요.


그런데 이 긍정성은 역설적이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탈진과 허무를 불러왔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라면, 모종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못난 사람'이 돼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까요?




권위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의 명령에 그저 따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그리 못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개인에게 기대되는 전부였죠.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세상을 원망할지언정 적어도 '내'가 못난 사람인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할 수 있다'고 외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어요.


노력만 하면 뭐든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은 자연스럽게 실패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못나서 못한거야'가 돼버린 것이죠.




SNS 속의 크고 멋진 집, 고급 승용차와 근육질의 몸매를 뽐내고 있는 셀럽들의 사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너도 할 수 있어, 뭐든지 이뤄낼 수 있어'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한병철 님은 이를 자기 착취를 불러일으키는 '과잉 긍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사람마다 놓인 환경이 다르고, 재능도 다르고, 주어진 운도 다르니까요.


그러나 끊임없는 과잉 긍정을 주입하는 피로사회는 모두 1등이 될 수는 없다는 엄정한 사실을 애써 무시합니다.


과잉 긍정이 불러온 이러한 착각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자신의 시간과 체력을 셀프로 착취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 계획을 세우며 하루를 효율적으로 살아내고자 하지만, 결국은 끊임없는 착취의 쳇바퀴 속에서 '번아웃'에 빠지고 말죠.




결국 김 사원이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을 더 해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지 않을지입니다.


「피로사회」가 제시하는 번아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정관()하는 삶, 즉 받아들이는 일상이에요. 마치 싸움을 하는 것 같이 하루하루를 투쟁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 시간이 가진 고유한 향기를 음미하는 것이죠.


그러나 사실 매일같이 지옥철을 타고 밥벌이를 나서는, 현생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간이 가진 고유한 향기' 같은 말은 너무 멀어 보여요.


우선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차, 넓은 집, 훌륭한 몸을 가질 수도 없거니와,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자는 주어진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죠. 





얼마 전에 작고하신 시대의 지성, 고(故) 이어령 선생님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모두가 한 방향으로 뛰면 아무리 잘 뛰어도 일등과 꼴등이 갈리지만, 모두가 각자의 방향으로 뛰면 한 명도 빠짐없이 1등이다."


한병철 님이 말하는「피로사회」는 단방향 레이스와 같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일등이 되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일 뿐이죠.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레이스는 무의미하고 소모적이게 느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신만의 방향으로 뛰어야 해요. 사회가 제시하는 이상과 목표를 향해서가 아니라, 오직 내게 주어진 것들에 집중하면서 말이죠.


햇볕이 따듯한 날씨가 좋은 오후, 다이어트와 자기 계발은 내려놓고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공원을 산책해 보세요. 


나도 모르게 쌓여왔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소소한 일상에 애정이 솟아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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