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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Jan 11. 2021

맞서싸우는 삶을 위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언 형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텍사스는 미국에서도 가장 '미국적인' 땅이다. 한국의 3배가 넘는 면적을 가지고 있는 이 광활한 대지는 원래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땅 이었고, 이후 에스파냐 령이 되었다가, 1835년에 미국 이주민들의 반란으로 공화국이 된 후 미국에 편입 되었다. 


자유와 전쟁으로 만들어진 땅,  '카우보이'로 대표 되는 텍사스의 개척자 정신은 미국의 심장인 것이다.


이후 광활한 대자연 속에서 악당들에 맞서는 텍사스 보안관은 헐리우드를 중심으로 끊임 없이 재생산 되며 아메리카의 심볼이 된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등장하는 보안관의 이미지는 하나같이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과거 아버지들의 영광을 읕조리며 시작한 영화는 곧 한 남자를 체포하는 젊은 보안관을 보여준다.  


"Everything is under control" 이라던 앳된 청년은 안타깝게도 얼마 등장하지도 못하고 너무나 쉽게 살해당한다. 이 청년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에 등장하는 보안관들, 그리고 그 보안관의 연장선상에 있는 텍사스인들의 이미지는 무력하다. 


그나마 르웰린 모스가 꽤나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무시무시한 살인마 안톤 쉬거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우연히 돈 가방을 발견한 모스는 예의 그 '프론티어 스피릿'을 여실히 발휘하며 (12구경 샷건으로 무장하며) 일확천금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카우보이 모스도, 베테랑 보안관 벨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은, 안톤 쉬거는 지금까지의 적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해 왔던 적들은 (벨의 진술처럼) "동기가 있는" 상대였다.


원래 그곳에 살고있던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에스파냐인은 비록 적일지언정 그 관계성 측면에서 기존의 질서에 속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먹구름 처럼 다가오고 있는 이 단발머리의 사내, 안톤 쉬거는 예측을 불허하는 존재다.


그의 살인에는 이유가 없다. 동전 던지기로 사람의 생명을 결정하는 그는 "당신이 직접 결정하"라는 피해자의 절규에 심드렁하게 "동전도 나랑 같은 생각일껄" 이라 대답하는, 우연성의 화신이다.  카우보이 모자와 보안관 뱃지로 표상되는 보수적 기존 질서는 끝이 없는 우연으로 구성된 '혼란'에 공격당한다. 


습격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는 무력하게 당하거나(차를 빼앗기고 살해당하거나 동전던지기 게임에 참여당하던 가게주인),열심히 맞서보지만 패배하고(모스), 협상 해보려다가 죽고(칼슨), 뒤쫓아가려고 해보지만 결국 포기할(벨) 뿐 이다. 


심지어, 영화 내내 극강의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안톤 쉬거를 다치게 한 것은 교통사고다. 이 어마무시한 악마 조차도 우연적인 사고 앞에선 무력했던 것이다.


코엔 형제는 등장인물들의 진술과 행동으로 주제의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소를 도살하려다 팔을 잃은 남자,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며 유부남을 꼬시려는 여인,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모스의 아내, 그들 모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주제선율의 동어반복이다. 


이렇듯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구시대적 논리와 철학을 낭만으로 간직한채 안주하는 자들과 이를 집어삼키는 무질서에 대한 영화로 보였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미국에게 있어 뼈 아픈 시기였다. 십수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온갖 히피 문화와 마약으로 얼룩졌으며, 오랜 냉전 끝에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군사 기술들이 난무 하고, 유명 배우와 대통령이 암살되는 혼돈의 도가니.


영화 속에 베트남 전에 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제시되는건 우연이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으로 인류 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고, 당위(當爲)의 세계가 혼란에 의해 잠식되어 갈 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스릴러의 탈을 쓴 채 미국의 현실을 바라본다.


결말부에 제시 되는 우화적인 꿈 이야기와 영화 속  디테일들이 이런 감상이 확대 해석이 아님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서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기에, 우리는 벨처럼 어딘가로 사라진 안톤 쉬거를 두려워하며 웅크려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기에- 다가오는 변화는 막을 수 없지만, 안톤 쉬거는 인식의 변화일 뿐 세상의 종말이 아니다. 다만 무력하고 한탄만 내뱉는 사람들(극 중 텍사스인들 처럼)에게 그 변화란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산업화 시대 이후로 점점 사람들을 집어삼켰던 무질서의 논리는 2020년 현재 더욱 힘을 얻었다.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은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지 오래고, ai,생명공학,물리학과 철학, 온갓 첨단의 결과들은 기존의 상식만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한 가득이다. 


하지만 사실, 무작위의 혼란은 항상 우리 곁에 있었다. 이제서야 그것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 한 것 뿐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불과 20년 전만 해도 당연하지 않았던 사례는 쇠털만큼 많다. 그만큼 당위란 얄팍한 것이다. 그러니 노인처럼 눈을 감고 가는 세월만 노래하고 있기엔, 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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