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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y 26. 2021

밥 딜런이 되지 못한
포크싱어들에게

코엔 형제, <Inside Llewyn Davis>

음악영화의 백미는 무엇보다 주인공이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다. 프레디가 "mama~" 하는 순간이나, 그레타나 앨리가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노래를 시작하는 순간, 우리들은 전율을 느낀다. 그 순간을 느끼고자 티켓을 사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위해.


그러나 프레디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노래하는 와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프레디도 좋지만, 잠시 스쳐 지나가는 컷 관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있는 이름 모를 남자는 어쩌다 저기까지 왔을까? 퀸의 팬일까? 그는 락앤롤을 좋아할까? 그보다 저런 곳에 혼자 온 걸까?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나 싶을 수는 있겠지만, 일단 내가 그런 사람이다.


영화라는 장르는 기본적으로 2:35:1의 비교적 답답한 화면과 2시간 남짓한 연속된 시간 속에 한정된 이야기다. 박경리 선생님의「토지」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 같은 위압적인 기획은 쉽지 않다. 관객들의 참을성도 그것을 용납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버리고 취해야 하는지는 영화의 완성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프레디의 목청은 취해진 장면이고, 배 나온 엑스트라 아저씨는 잘라내진 장면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모두 알고 있다. 현실은 인스타그램 같이 조작되고 연출된 미장센의 연속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상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보다는 조명도 미술도 없이 별 볼 일 없는 밋밋하고 지루한 씬이 러닝타임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현생인 것을. 괜찮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수염 기른 곱상한 남자, 뉴욕의 겨울과 기타, 그리고 고양이라니. 온갖 시네마틱 한 낭만과 우수에 젖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르윈 데이비스의 내면에 관한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할 2시간을 기대하며 영화를 틀었다면, 아마 당신은 적지 않은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엔 형제다. 5공시절 여고생 깻잎머리를 가지고 영화 역사상 가장 살벌한 살인마를 만들어낸 자들이다. 「once」를 기대한 사람이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리 말하자면 고양이와의 아름다운 우정은 없다. 그는 시종일관 심드렁하고 도망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린다. 그래도 귀엽다. 고양이니까..  캐리 멀리건과의 애틋한 사랑도 없다. 진(캐리 멀리건)은 르윈에게 말한다. 


"콘돔을 두 겹으로 씌울 걸 그랬어. 여자를 생각해서라도 안 하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하게 된다면 콘돔 위에 콘돔 끼고 전기 테이프로 감아 아예 콘돔 뒤집어쓰고 살아. 넌 그냥 살아있는 생명체랑 접촉을 하지 마."


돈도 친구도 수완도 없는 찌질한 르윈, 그러나 밥 딜런이 되지 못해도 포크송은 부를 수 있다. 코엔 형제의 카메라는 르윈의 여행을 집요하게 조망한다. 축축하고 추운 그곳의 겨울에 지루하고 비루한 한 가수의 여정이 있었다. 전 세계로 송출되는 LIVE AID 공연만큼,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전설적인 콘서트만큼 더 조망할 가치가 있었던 여정이-.


한 사람의 내면을 본다는 것은 여간 잔인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과 그에 걸맞은 내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만, 그래서 남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자책의 새벽을 보내곤 하지만, 사람은 우상이 될 수 없다. 


별도 가까이 가서 보면 불타는 가스 덩어리 내지는 돌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두 가지의 가능한 선택지가 있다. 별이 아름답다면 곰보자국으로 가득한 불타는 돌덩어리도 아름답고, 돌덩어리가 추하다면 별도 추하다. 나는 전자를 택하겠다.


어디선가 가수와 무희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축제를 빼앗겼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니체였던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확한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잘하지 못하는 노래를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긴다. 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축제와 춤, 노래는 본래 모두의 것 이어야 한다. 돈을 주고 무대에 불러온 가수들이나 춤꾼들이 주인공이어서는 그런 괴랄한 주객전도가 없는 것이다.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가수, 르윈은 괴롭다. 인정받지 못한 예술은 소꿉장난이고 벌지 못하는 직업은 취미라서, 누군가 무심코 적어둔 화장실의 낙서 (What are you doing?)를 보고 그의 눈빛은 애처롭게 흔들렸다. 음악을 그만두려는 그를 말리는 진에게 르윈은 말한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너무 피곤해, 이제 관둘 거야"


누가 말리랴. 먹고는 살아야지 않겠는가.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변함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영화의 러닝타임이 끝난 후, 돈을 벌기 위해 배를 타던 입대를 하던 계속 무일푼의 삶을 살든 간에 르윈은 포크싱어라는 것이다. 레너드 코헨이 아니더라도, 밥 딜런이 되지 못하더라도, 포크송을 부르는 한 그는 오롯한 예술가임이다. 커다란 스테이지나 수만 명의 팬클럽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포크송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Play me something from... inside Llewyn Davis."


"Hang me, oh hang me..

I'll be dead and gone 


Hang me, oh hang me..

I'll be dead and go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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