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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y 24. 2021

카우보이, 삶의 끝에 서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장 마크 발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누구나 스스로를 향해 가지는 형태적 이미지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몇 번의 추상 작업을 거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골조라고 할까. 그 일련의 이미지는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된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려왔던 심상, 그것이 각자의 세상을 떠받치는 밑그림이다.


계단을 오르는 형상일 수도 있고, 드넓은 대지를 끝없이 걷는 모습일 수도 있다. 눅진한 늪지대를 힘겹게 건너는 그림일 수도, 같은 자리를 한없이 맴도는 그림일 수도 있다.  


그 심상은 심성과 경험의 꿀꿀이 죽이다. 그래서 왜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그 인과를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많은 중첩된 원인의 연속 이던가. 그러나, 그 걸쭉한 것을 단칼에 잘라내곤 하는 사건이 있다. 그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평화(平化)시키는 심원한 중력, 바로 죽음이다.


섹스와 로데오, 그리고 술과 마약으로 살아가는 카우보이 론 우드루프. 그의 골조는 되는대로 막 그어진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다. 이리 튀고 저리 튀며 아무런 질서도 목적도 없었던 그에게 불쑥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에이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그는 살길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동료 환자 레이언을 만나 자국에서는 금지된 의약품을 공구(?) 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을 설립하게 된다.


결국 그가 찾아낸 살 길은 어떤 형상이었을까? 


온통 씨끄럽고 산만하며 거칠고 통제되지 않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다. 그들이 술과 마약으로 얼룩 지워서 가리고자 하는 것은, 백지장 같이 아득한 외로움 이리라. 


죽음 앞에 선 론, 그는 살고 싶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저와 같이 살고자 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목전에서 존중과 평화를 배웠다.


중학생 시절, 천상병 시인의 유명한 구절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을 두고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정신병 때문에 이렇게 썼다' 고 얘기했던 선생님이 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상사는 고통이고, 그중에서도 천상병 시인과 같은 인생은 농축된 비극이기 때문에, 반쯤 미치지 않고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사가 고통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심상에 불과하다. 이제는 얼굴도 성함도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분은 아마 하루하루를 '버티'고 '견디'는 것을 만고의 지혜인 양 받아들이는 성향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론 우드루프도 그랬다. 터프하고 쿨 해보이는 카우보이 모자와 부츠, 그리고 로데오 같은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자 했다. 


그에게 인생은 살아내야 하는 것,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성큼성큼 다가오는 하루의 공포 앞에서 그는 잔뜩 몸을 웅크리며 살려달라고 되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테제는 어떤 외부요인에 의해 '살려짐' 당하는 수동태일 수 없다. 그것은 죽어감일 따름이다. 에이즈라는 눈에 보이는 적이 나타난 순간, 론은 스스로 알아채지도 못한 사이 분연히 일어나며 단칼에 '살아간다'는 능동태로의 전환을 수행한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으나, 막바지에나마 그런 순간이, 고행이 소풍이 되는 순간이 찾아왔음을, 론은 감사했을 것이다.


살아남고, 살아내고, 살아가는 그 모든 하루들을 산책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새벽빛이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과 같이 서로의 손을 맞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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