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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Apr 22. 2021

인생이 꽃이 될 때
「화양연화」

왕가위, <화양연화>

누군들 없겠는가. 잠들지 못하는 밤 난파선처럼 떠오르는 기억이.


같은 날 좁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첸 부인과 차우. 답답하고 축축한 이 곳에서 비밀스러운 사랑은 시작된다.


이들의 사랑은 정당하지 못하다. 첸과 차우의 만남은 사람들과 각자 배우자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온 세상으로부터 숨더라도 절대 피하지 못할 것이 자기 자신의 눈이 아니던가.


첸과 차우의 사랑은 선인장을 쥐듯이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서로를 놓지 못했던 건,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눈물에 어리기 때문이다.


왕가위 감독의 카메라는 붓과 같다. 프레임을 화폭처럼, 피사체를 정물처럼 활용하는 의 미장센 앞에 영화는 결국 이미지였다.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구체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기하학적인 황금비가 무용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미적인 아름다움과 도덕적인 정당성 사이에는 어떠한 결착도 없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롱 앞에 첸과 차우는 할 말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추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도덕적 당위는 기능적 질서와 규칙의 차원이고, 심미적 아름다움은 관념과 감각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 우리는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까?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집단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근원적인 형태는 아마도 이데아적인 무언가 아닐까.


우리는 대상이 무결성에 가깝다고 느낄 때 미적인 아름다움으로 감각한다. 비단 이성 간의 성애적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식을 완성한 수학자들이 그럴 것이고,  대작을 완성시킨 건축가가 그럴 것이다. 남이 하면 불륜인 것이 내가 하면 로맨스인 이유,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유독 아름다운 이유, 첸과 차우의 사랑이 삶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이유. 그것은 바로 무결성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뜻이다.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딨겠는가. 그러나 첫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어린 남녀는 그것을 모른다. 


상대방이 완벽할 것이라고 믿고, 미숙하기 때문에 실패한다. 실패로 남은 사랑은 상상 속의 이미지적 존재로 남고, 그 존재는 실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흠집 날 수 없다. 그래서 첫사랑은 다 아름다운 것이다.  


첸과 차우 역시 마찬가지다. 이루어질 수 없고, 서로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한정적이고 간접적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다. 익명의 배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花樣年華,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눈물에 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꽃처럼 피어나는 무결한 그 순간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함께 가겠소?"



그들의 가능성은 이어진 듯이 이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질 듯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왕가위의 카메라는 그 위태로운 가능성의 줄타기를 조망한다. 터질 듯 터지지 않게, 지루하리만치 조용하게. 그러나 <화양연화>는 그래서 온전히 완성될 수 있었다. 


첸과 차우가 미칠 듯이 사랑을 터뜨리는 이야기는 가능성의 세계에만 남겨놨기 때문에. 영화를 관람한 11만 명의 관객들에게 난파선처럼 떠오르는 11만 개의 '어쩌면'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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