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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30. 2021

80년대, 그 미숙함의 초상
「살인의 추억」

봉준호, <살인의 추억>

10년 전,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세상은 mp3, 윈도우 xp와 전자사전이 남아있던 아날로그 시대의 황혼을 보내고 있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나는 그때쯤 처음 담배를 피웠다.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가는 티켓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언가 특별한 집단의 표식이라고 믿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생각이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생각이 한둘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흑역사'로 점철된 시절, 그러나 누구나 그럴 때가 있었다


미숙했기에 성숙할 수 있었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언젠가 이 또한 아련한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라고 애써 변명해보아도 아직까지는 가끔 밤중에 애꿎은 이불을 힘껏 차곤 한다.


조금은 철이 들어갈 때쯤 처음으로 한 것이 금연이었다. 담배연기가 어린 날의 치기와 부끄러움을 자꾸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금연을 한 지 3년째가 된 지금도 종종 담배 한 대가 간절해질 때가 있다. 과거의 미숙함이 내 몸에 흉터처럼 남은 셈이다.


언젠가 한 다큐멘터리에서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참전용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는 피부 재건술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나온 시간들의 교훈을 기억하는 그 만의 방식이리라.


신체적이든 정서적이든 상처는 일종의 결핍이다. 그리고, 결핍은 동기(動機)가 된다. 상처와 흉터를 무작정 덮어 잊지 않고 들춰내고 복기해야 할 이유다. 


우리에게는 미숙함을 벗고 성숙으로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1986년,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접경지에 있던 원전이 폭발했다. 대한민국에서는 아시안게임의 열기가 뜨거웠고, 경기도의 이름 모를 야산에서는 한 노인의 사체가 발견됐다. 건국이래 최대의 미스터리라고 불리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의 시작이다. 


미스터리라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서 돌아본 사건의 전말은 전혀 미스터리컬하지 않았다. 온갖 어리숙함과 말도 안 되는 실수들의 연쇄반응이 한 범죄자의 난동에 불을 지폈을 뿐이었다. 빈약한 근거와 수사력으로 진범을 잡을 기회를 수도 없이 놓쳤고, 위압적인 공권력의 폭력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봉준호 감독은 1980년대 대한민국, 그 시절의 초상을 영화로 찍어 남겼다. 우리의 가장 아픈 흉터를 기억하자는 듯이 말이다. 가장 폭발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으나, 가장 뚜렷한 성장통을 남겼던 그때, 한적한 시골마을의 연쇄살인사건은 무너져 내렸던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동어반복이었다. 


미성숙한 사회구조 속에서 결국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귀결이자 고통인 것이다.


작중에서 박두만(송강호)과 조용구(김뢰하)로 대표되는 어리숙하나 폭력적인 캐릭터는 당시 대한민국 전체(특히 기득권층)에 드리웠던 비합리성의 표상이다. 예전에 용구의 캐릭터성을 '기형적' 사회구조의 상징이라 칭했던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기형, 과연 그렇기만 한가. 용구가 다리 절단 수술을 받을 때 두만을 바라보던 처절하고 나약한 눈빛이, 비정상적 인간의 그것이었을까?


물론 상징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기형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또 다른 폭력을 인지해야 한다. 사실 용구와 두만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상이었다.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눈으로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단죄해야 하는 것은 상징으로서의 캐릭터이지, 개인으로서 그들이 아니다.


수술대에 누운 용구(동의서에 사인해줄 가족도 없었던)를 바라보는, 안쓰러움이 가득한 두만의 눈을 보라. 그것이 아팠던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이어야 한다.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라고 적혀있다. 두만과 용구라고, 아니면 또 다른 경찰들이라고 이 정신 나간 살인자를 잡고 싶지 않았겠는가. 극이 진행될수록 견지해오던 신념을 잃고 점차 한 명의 유약한 개인으로 돌아가는 두만과 태윤은, 재난에 가까운 상황 앞에 놓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워서는, 우린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을 수 없다.


물론 당시 수사과정에 책임이 있던 자들, 더 나아가서 사회 전반을 비리와 폭력으로 얼룩지게 했던 사람들에게 잘못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응당 단죄받아야 하고, 죄책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와 유사한 사태는 분명히 벌어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80년대의 아픔은 일탈적인 사고라기 보단, 사회변화의 맥락 속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아픈 흉터를 직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시적으로 비정상적이었던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타자화된 시선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상처를 덮어놓는 행위와 유사하다.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속된 시간적 맥락 속에서 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세기말의 상처는 아직 분명한 흉터로 유효하게 남아있다. 






어른이 된 지금 돌아보면 사춘기 시절의 나는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내가 비정상적이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 미숙함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또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20대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 질지도 모르는 일이다(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연속된 시간 속에서 탑을 쌓아 올리듯 살아간다. 그때의 나도 분명히 나였다. 있는 힘껏 이불을 차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두만과 용구는 아직 건재하다. 기득권의 군홧발이 공공연히 시민을 짓밟고 샤머니즘으로 범죄를 해결하려는 시대는 저물었지만, 세대와 성별, 정치색과 경제 계급으로 분열하여 서로가 서로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익명의 야만성을 보면 또 다른 폭력의 시대는 언제든지 도래할 수 있음을 느낀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명징하다. 현재의 나도 결국은 과도기적 과정에 불과함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의 신념, 믿음, 당위적인 가치도 언젠가는 '20년대의 추억'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유야무야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고, 그 어떤 명제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곁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타자들, 그들은 모두 나와 같은 피와 살을 공유하며 같은 배를 탄 친구라는 연대의식-. 그것이 역사의 탑을 떠받치는 대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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