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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24. 2021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잃은 것,
「콩나물」

윤가은. <콩나물>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일까? 이 낱말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점심때 친구와 함께 냉면을 먹었어"

    

위의 문장은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다시 침대에 눕기까지의 과정은 분절 없는 무수한 사건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어느 특정한 단락과 행위를 떼어내 '친구와 함께 냉면을 먹었'다는 매듭지어진 스토리로 기억하고 받아들인다.


이는 기억에 대한 생각의 작동방식 때문이다. 학창 시절, 영어단어들을 억지로 연관시켜 이야기를 만들어 외우는 연상법을 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을 스토리로 받아들이고, 기억한다. 그래서 삶은 모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는 수천 년 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생각을 모두 이야기로 만들었고, 전달했다. 


그 이야기는 마치 눈덩이처럼 입에서 입으로, 또 입에서 문자로 전해졌고, 그것은 신화가 되고, 서사시가 되었다. 이런 고전적인 이야기 형식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기행문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그렇고, 단테의 신곡이 그렇다. 


스토리 속의 주체는 항상 익숙한 곳을 떠나 여행을 하며 고난을 만나고, 다시 돌아왔을 땐 전과는 다른 모습이 된다. 


기행문이 이야기의 대표적인 원형이 된 것은 삶과의 형태적 유사성 때문이다. 익숙했던 어머니의 몸을 떠나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성숙한 모습으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 말이다. 


인생에 대한 비유 중 가장 흔한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만큼 삶이란 하나의 모험과 유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귀여운 소녀인 보리가 생에 첫 번째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있다. 윤가은 감독의 <콩나물>은 기본적으로 기행문의 형태를 띤다. 


보리는 유치원도 혼자서 등원하지 못하지만, 엄마의 아이 취급에 화가 나 콩나물을 사기 위해 덜컥 세상으로 나와버리고 만다. 그러나 시장으로 가는 길은 보리에게는 험난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모르는 아저씨, 길가에 서성이는 강아지(귀여운 골든리트리버), 공사장, 놀이터의 유혹과 무서운 언니(초등학생)까지. 시장 가는 길이 이토록 멀었던가. 그럼에도 씩씩한 보리는 굳게 나아간다. 


이름 모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결국에는 기어코 시장에 다다른다. 그런데, 무엇을 사러 왔냐는 야채가게 아주머니의 질문에 보리는 대답하지 못한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까먹었기 때문에. 


생에 첫 모험에서 보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사실 딱히 없어 보인다. 결국 콩나물은 사지 못했고, 엄마는 보리가 여행을 떠났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작중의 보리가 마주했던 고난들은 어른인 관객들이 보기에는 실로 실소 나오는 것이었다. 대단한 지혜도 엄청난 용기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보리의 모험은 오디세우스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


지혜와 용기 같은 지엄한 덕목들 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위신과 체통을 위해, 어른으로 대접받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것- 바로 순수함이다.


보리가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는 콩나물을 특히나 좋아하던 할아버지의 제사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극의 초반부 엄마와 친척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어른들이 콩나물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작은 아버지에게 혼날까봐' 이지, 할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는 극의 종반부에 제사를 올리는 장면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리가 절을 하고 있는 동안 작게 들리는 대사를 잘 들어보면, "콩나물이 없어도 티가 안 나는데요? 다음부터는 빼도 되겠어요" "콩나물에 콩자도 꺼내지 마"였다. 결국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가져온 것은 보리뿐이었다. 비록 콩나물은 까먹었지만 말이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본래의 의미와 순수를 잃은 채 껍데기만 남은 것이 얼마나 많던가. 특정한 의식이나 행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그 자체에서 말이다. 


그렇게 진중하고 엄숙한 어른들의 세상은 얼마나 훌륭하고 심오한가. 법전의 복잡하고 암호 같은 문장이 처음 글을 깨친 할머니의 시보다 심오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윤가은 감독님의 말에 따르면,  <콩나물>은 자신이 처음으로 성공했던 심부름에 대한 추억과 얼굴을 보지 못한 할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을 섞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연가인 셈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어른의 이유'로 잠이 오지 않는 밤, 처음 집을 떠나봤던 순간을 기록해보자.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 <콩나물>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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