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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22. 2021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
「어바웃 타임」

리처드 커티스, <어바웃 타임>

장맛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여름날, 나무의자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화도 제대로 터지지 않는 시골의 장마는 도시의 그것과 전혀 다른 무엇이었다. 


모든 걸 집어삼키듯이 터져 나오는 빗방울들의 소리와 유화 물감 같이 짙푸른 색으로 채색된 새벽의 공기가, 마치 어느 이름 모를 망망대해 한가운데 오롯이 떠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했다. 


나는 그때 앞으로 내 인생에 이보다 더 충만한 순간은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경계가 흐릿하게 융화되는 그 온전한 완결성-. 그것은 실증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연산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라는 개체성을 잊는다는 것은 주체로써의 지위를 포기하고 풍경의 일부로 스며든다는 뜻이다. 그것은, 강처럼 고고하게 흐르는 시간 위에 나 자신을 부유(浮遊)시키는 일이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은 그 모체인 시공간을 배제할 수 없고, 그래서 우리 사고의 지평은 한계를 갖는다. 삶을 정의한다는 것은 시공간을 정의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어바웃 타임>은 <about life>의 동의어가 된다. 


시간이니 인생이니 하는 준엄한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하고 귀여운 시골청년의 사랑 영화임에도 그렇다. 소박한 문장이 엄숙한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릴케의 시집을 하나 선물해 주도록 하자.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누군가에겐 전쟁이고, 어쩌면 유희이며, 어쩌면 권태이자 허무다. 70억 개의 삶에는 70억 개의 정의가 있다. 삶을 정의한다는 것은 한토막 언어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태도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매 순간을 받아들이는 작업의 연속이다. 우리는 매 순간 삶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순간이란 연속된 과정의 일부인 동시에 온전한 완결성을 지닌 우주 그 자체가 된다.


 시간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불가지 한 무언가 일까? 작중의 팀도 여느 보통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대로 살아가며 짜릿한 연애를 꿈꾸는 소박한 청년일 뿐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새해 첫날 자신의 능력(시간을 여행하는)을 알게 된 이후 팀은 어떤 의무 속에 던져졌다.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결국 시간과 인생에 대한 정의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묻는 아버지에게 팀은 돈을 벌고 싶다고 대답한다. 


시간을 물질과 교환하고자 했던 팀은 곧 아버지의 만류에 마음을 바꾸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간을 돈과 바꾸고자 했던 팀의 생각은 사실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다. 특히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화폐는 가치의 교환수단일 뿐이지만, 축적된 가치가 별로 없는 젊은이들에게 생산성을 가질만한 수단은 오직 주어진 시간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돈의 대응관계에 갇혀버린 이들은, 그 이상으로 사고를 확장해보지 못한 채 시간(삶)을 물질로 정의해버리고 만다.


  팀은 보통의 청년들은 누리기 힘든 몇 가지 행운이 있었다. 훌륭한 어른인 아버지가 있었고, 또 남들보다 주어진 시간이 몇 배나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행운을 가진 팀을 보는 행운을 가졌으니, 결국은 비긴 셈이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반복된 시행착오 끝에 그가 찾아낸 행복의 통찰은 역설적이게도,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행복이란 것을 배부름이나 쾌감 같은, 어떤 특정한 조건들이 만족된 상태라고 생각했던 그는 시간을 끊임없이 돌리더라도 그 상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킷캣의 비극을 통해서 말이다.

 

  행복이란 어떤 필수조건들이 만족되면 비로소 다르게 되는 어떤 '상태'가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기분과 근본 기분을 구분하고, 그 예로 불안과 두려움을 꼽았다. 두려움은 특정한 대상 때문에 느끼는 특정한 기분이지만 불안은 그런 일대일 대응관계에서 벗어난 근본적인 기분이라는 것이다.


행복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거나, 건강하다거나, 그런 특정한 조건들과 대응관계를 이루는 특정한 상태가 아닌, 그런 관계성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밑바탕에 가깝다. 행복해진다는 것은 어떤 조건들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언제나 곁에서 흐르고 있던, 세상의 은유 속에 감춰져 있던 선율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팀은 그것을 아버지로 표상되는 성숙한 삶의 태도를 통해 깨닫는다. 아버지와 함께 해변을 걸으며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던 그는, 시간여행의 무의미에 대한 잔잔한 통찰을 얻는다.


백번이고 천 번이고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결국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것과 같다. 몇 번을 살더라도, 매 순간 속에 그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같다. 그것은 '한번 사는 것은 살지 않는 것과 같'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처럼, 지극히 실존적인 깨달음이었다.


삶의 행복에는 어떠한 당위적인 조건도, 어떤 대응 관계도 없다는 사실 말이다. 팀은 그 깨달음을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태도로써 정의했다.


 




 내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또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고민은 무의미하다. 초능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매 순간 시간여행을 하고 있기에 그렇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무한한 억겁의 시간 속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 순간 속에 우리가 있기 위해 온우주의 모든 시간과 사건이 필요했다. 이것은 문학적 수사()가 아닌 엄정한 사실이다. 거센 장맛비가 들이치던 그 여름날, 피부를 두드리던 빗소리의 조용한 진동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매 순간, 지금 이 순간, 오직 이 순간을 살기 위해 당신은 억겁의 세월을 여행했고, 비로소 이곳에 도착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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