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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Mar 13. 2021

도시인들의 작은 숲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리틀 포레스트>

 레푸기움(Refugium)이라는 말이 있다. 피난처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원래는 빙하기 같이 광범위한 집단적 비극에서 살아남은 일부의 개체가 머무는 장소를 뜻하는데, 그러나 지금 이 레푸기움이 가지는 의미는 비단 물리적 공간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화난 부모님을 피해 숨던 어두운 옷장 속,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 달콤한 디저트나 땀을 흠뻑 흘리며 달리는 순간-. 나를 위협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레푸기움이다.  사람은 누구나 피난처가 필요하다. 


개인으로써 인간은 나약해서, 그런 마음속 동굴이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하고, 친구를 만나며 가족을 만드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내 경험상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공통적인 레푸기움이 있는데, '고향'이라고 불리는 어떤 목가적 이미지가 그것이다. 내리쬐는 햇빛과 여유로운 생활리듬, 깨끗한 환경과 서정적인 풍경이 있는 어떤 시골마을 말이다. 실제 나고 자란 곳은 도시인 사람들도 왜인지 고향이라 하면 농촌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시골과 자연에 대한 문화적 콘텐츠가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TV 프로그램(ex삼시세끼)부터 귀농귀촌 같은 사회적 현상까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부풀어 오르듯이-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이 집약된 빌딩의 육중함에 눌린 사람들이 피할 곳은 논밭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도시인들의 레푸기움은 일종의 휴양지로써의 시골이지, 생활의 전선으로써 시골이 아니라는 점이다.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는 시골의 낭만을 그린 콘텐츠 중에 으뜸이다. 보기만 해도 청아 해지는 것 같은 시골의 풍경들과 김태리와 류준열 등의 때 묻지 않은 이미지와 연기,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들. 


그 세 박자의 요소들로 인해 마치 먼 과거 경험한 적 있었던 것 같은, 꿈같은 시절을 추억처럼 직조해낸다. <건축학개론>의 수지가 관객들로 하여금 있지도 않은 첫사랑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리틀 포레스트>의 김태리는 신촌에서 태어난 내게 그리운 고향을 만들어준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이미지들은 도시 사람들의 낭만으로써 존재한다. 작중 혜원의 고향은 주인공의 인생에서 예외적인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하와 은숙 역시 풍경의 일부로써 성격을 갖는다. 혜원의 인생이 실질적으로 펼쳐지는 장소는 결국 도시다. 주류문화에서 시골이란 일종의 기능적 존재로, 주류로의 복귀를 전제한 타자적 공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중에서 역시 도시에서 식당을 개업한 혜원을 위해, 재하와 은숙은 혜원의 텃밭을 대신 관리해줘야 했다. 


영화관에서 풀냄새를 맡는 마법적인 경험만으로도 이 영화가 가진 가치는 충분하지만, 시골이 도시에 딸린 휴양지는 아니다. 그곳도 도시와 마찬가지로 전쟁 같은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땀이 배어 있는 곳이다. 


시골 역시 도시와 다를바 없는, 생활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존중해야한다. 그것이 우리들의 작은 숲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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