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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엔 Nov 17. 2020

시간, 강하다. 재미없다.

그냥 일기

시간은 다 똑같이 주어지고 다 똑같이 흐른다. 또한 냉정하고 야속하다. 그리고 강하다

무기력하다. 무능하다. 무지하다. 무식하다. 를 다 갖춘 사람이 내 직속 상사이다.

그럼에도 난 그 사람을 뛰어넘지 못한다. 아무리 관련 자격증이 많아도, 책상에 앉아서 이론과 원리를 통달했음에도 30년의 경험을 이기진 못 한다는 걸 느꼈을 땐 나도 무기력해진다.

나는 역에서 일한다. 내가 관리하는 역은 3개의 역이다. 이 3개의 역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역이지만 일이 정말 많다. 김장철인 요즘 김장김치로 추정되는 자기 몸만 한 박스를 들고 열차 타러 오시는 어르신들 짐들어들이는 작은 일부터 열차가 탈선할 수도 있는 장애물을 미연에 방지하고 관리하는 비교적 큰일까지 모두 이 이름 모를 역에서 이루어진다.

우린 보통 예상치 못한 상황을 '장애'라 칭한다. 앞서 말한 짐들어들이는 일은 장애가 아니다. 이때쯤 짐들 일이 존재한다는 것까지 추측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매뉴얼을 만들고 그걸 토대로 움직여야 열차 지연 및 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 하지만 기차가 다니는 길에 먼지만한 쇳조각이 있어 발생한 사소한 상황도 장애다. 반면에 쥐가 전선을 파먹어 신호등에 불이 안 들어와 자칫하면 열차가 신호를 지키지 못해 발생하는 대형 장애도 있다. 그러나 우린 경중을 떠나 예상치 못한 모든 일을 장애라 한다.

집에 불이 나면 소방대원분들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다. 도둑이 들거나 강도를 만나면 경찰이 출동한다. 그들은 출동하는 것을 망설이거나 출동을 안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망설이면 인명사고가 고 재산손실이 발생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장애가 나면 관련부서로 연락하거나 우리가 처리해야 한다. 접수를 받고도 망설이면 뉴스에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소방대원과 경찰과는 달리 장애에 맞는 장비를 지레짐작하여 챙겨야 한다. 아무도 알려주지도 챙겨주지도 않는다. 여기서 냉정한 시간은 나와 내 상사 간에 차이를 만들었다. 나의 상사들은 수십수백 개의 장비들 중 그들이 그동안 경험한 각각의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장비를 한가득 챙긴다.

나는 수십 개의 장애를 공부했다. 그에 맞는 수십 가지의 장비들을 외웠고 쓰임을 숙지했다. 내 직속 상사의 과거는 잘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건 장애만 터지면 어린아이가 길 한복판에서 사나운 개를 만난 것 마냥 얼어서 같은 말만 반복하며 가기를 망설인다. 장비 챙기라고 주는 금 같은 귀한 시간을 우리 직속상관은 아마 그 상황을 인정 못 하고 머릿속에서 부정하고 있는 시간인가 보다 처음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당황했다. 두 번째엔 나라도 해결해야 했으며, 세 번째엔 내가 한심하게 느끼는 저 직속상관보다 모르는 걸 인정하는 게 화가 났다. 반면에 내 상사는 처음에도, 두 번째, 세 번째도 얼어있다. 그러고는 장애가 난 현장에 갈 때까지 같은 말만 반복하며 중얼거린다. 현장에 도착하면 그제야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그간 경험으로 파악하고 다시 사무실로 간다. 두 번 일하는 셈이다. 어쩔 땐 규격을 착각해 3번 4번 되돌아 간 적도 있다. 분명히 무능해 보이고 답답한데 결국 해결은 한다. 그래서 나는 할 말이 없다. 여기서 내 자격증, 내 이론은 휴지조각이다.

이렇듯 나의 10개월의 공부는 그의 30년의 경험을 뛰어넘지 못한다. 시간엔 그만한 힘이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리 재능이 없는 한 가지 일을 30년간 하면 흉내라도 내긴 낸다는 것이다. 글 쓰는 것, 책내는 것, 정말 하고 싶다. 그러나 8주간의 내가 올린 글로 봤을 때 실력이 늘긴 늘지만 미약하다. 매주 같은 시간에 성실히 올리지만 나만 안다. 하지만 할만하다.(마냥 즐겁다고는 못 하겠다.) 그래서 나도 우리 무능한 상사처럼 제일 강력한 무기인 시간을 투자해볼 생각이다.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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