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들
/ 김동관
새벽 3시, 잠에서 깨어 화장실을 다녀온 후 다시 침대에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몸을 빠져나와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너는 누구니?"라고 묻는다.
나란 존재는 70프로의 물과 30프로의 분자들로 만들어진 60킬로의 육체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정신이다. 60조 개의 진핵세포들의 조합인 내 몸이 흩어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는 1 경개의 미토콘드리아와 200백만 종류의 단백질을 합성하고 있는 2만 4천 개 유전자의 분주한 현상이다. 나를 존재하게 했던 아버지의 정자 속 23개의 염색체와 어머니의 난자 속 23개의 염색체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2년 전에 원래의 원자들로 다시 돌아가신 아버지와 고장 난 신경세포로 인해 침대에 누워계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내 존재의 시작이었던 부모의 몸을 기준으로 볼 때 환갑이 지난 나의 몸도 완전히 해체되어 우주의 먼지로 흩어질 시간이 28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들은 내 뇌 속에 있는 천억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 연결하면서 작동하는 100조 개의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정신 현상이다. 이 정신은 내 존재에게 허락된 28년이란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삶의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1. 나는 이제껏 잘 살아왔는가?
2. 지금 내 곁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3. 지금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지?
4. 올해 내가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선다면 후회할 일은 없는가?
5.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버드대 교수를 그만두고 콩코드 호숫가 숲 속에 작은 나무집을 손수 짓고 그곳에서 2년 2개월을 살았던 핸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그의 명상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죽음의 순간에 다 달았을 때, 내가 잘 못 살았음을 깨닫는 일이 없도록 지금 내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서 난 스스로 숲 속으로 들어갔다."
독일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런 시를 남겼다.
"나는 왔누나
온 곳을 모르면서
나는 있누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내 인생 50년의 삶은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은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종교인들의 반복된 가르침에 가스라이팅 당해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보다는 노예로 사는 것에 만족했고, 내 삶을 내가 책임지고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며 살기보단 주가 책임져 주실 것이니 주의 뜻대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살았었다. 그래서 내 몸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우주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인간들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나는 왜 이런 신념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해서 내가 얼마나 무지하다는 것도 모르고 난 영적인 사람으로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살았었다. 그래서 굳이 머리 아프게 복잡한 세상을 공부할 필요도 없었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묻지 않았었다. 내 마음은 강같이 평온했었다.
그런데 인터넷의 혁명으로 정보의 폭발시대에 살게 되면서 무지몽매했던 나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138억 년 전 빅뱅이 있었고 백만분의 1초의 순간에 쿼크 3개가 뭉쳐 양성자가 만들어졌으며 38만 년이 지나 전자와 결합한 최초의 원자인 수소가 생겨났다는 것을. 빅뱅 후 3억 년 후부터 원자들이 모여 별들이 탄생하기 시작했고 지금부터 46억 년 전에는 우리의 태양과 지구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38억 년 전 바닷속에서 원핵세포들이 생겨났고 20억 년 전엔 세포 안으로 알파프로테오박테리아가 들어와 미토콘드리아가 되어 산소를 이용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세포핵 속의 DNA가 단백질을 합성하고 유전자를 복제할 수 있는 진핵세포가 출현했음을. 10억 년 전에는 광합성을 하던 시아노박테리아가 진핵세포 안으로 들어와 엽록체가 되어 햇빛을 이용해 영양분을 만드는 식물세포가 출현했음을, 5억 년 전엔 물 없이도 광합성을 하는 이끼류 식물이 육지에 생겨났고 바다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그리고 3억 년 전쯤엔 단단한 세포를 만들어 높이 자랄 수 있게 하는 리그닌 성분으로 인해 거대한 나무들이 육지를 뒤덮었고 니그린을 분해할 미생물이 없어서 나무들이 썩지 않고 석탄으로 묻혔다는 것을. 그리고 2억 년 전부턴 땅 위에 거대한 공룡들이 지상을 지배했지만 6천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공룡이 멸종하고 2백만 년 전엔 직립하면서 불을 사용하는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고 드디어 30만 년 전에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언스가 출현했다는 것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진화를 거듭해서 존재하게 된 우리의 조상들이 1만 년 전부터는 한 곳에 정착해 살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문명을 이루었다는 것을.
겨우 100년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와 신화의 창조 이야기를 믿고 살았지만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창조해 내고 생명을 복제하며 AI를 만들어 인간을 대체할 로봇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대를 사는 교양인들은 이와 같은 138억 년의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양한 증거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이런 과학이론들이 이전의 종교적 신념을 대치하게 되어 현대인들의 주류 믿음이 되어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각자가 답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138억 년의 우주의 역사가 만든 기적이라는 사실에서 무한한 경외심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이 어떤 목적도 없이 이 땅에 우연히 내 던져진 실존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전적으로 본인이 선택해야 하는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가 되었음에 현기증을 느끼게 되었다. 현대 물리학의 발전으로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많이 풀렸지만 여전히 인간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궁극적인 죽음의 문제 앞에서 홀로 서야 한다. 그래서 언제인지 모르는 때, 문득 나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 지난 삶을 후회 없이 살았음으로 여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란 질문이 중요한 인간 실존의 문제가 된 것이다.
오늘도 세상의 종교 신봉자들은 '구원, 구세주, 신의 축복, 신의 뜻, 천국과 영생’ 등의 언어로 나 밖의 어떤 존재가 나의 삶을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 것이다. 관계 속에서만 잠시 존재하다 영원한 무로 환원되는 죽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치열하게 씨름하고 사유하면서 만들어 가야 할 현실적 삶을 외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문득 죽음의 순간이 눈앞에 들이닥쳤을 때 제대로 삶을 살지 못했다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할 위험이 있다. 물론 현대 과학의 발견들을 다 부정하고 신화적 세계였던 2천 년 전 어떤 사람들이 주장했던 그 가르침을 더 믿고 따라 살면서 죽고 나면 몸이 다시 건강하게 부활할 것이고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기쁨으로 환영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어떤 후회도 여한도 없이 천국으로 입장하는 환희를 갖고서 평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두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헤매지 말고 선택한 그 길을 후회 없이 정진해야 한다.
역사상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이었던 고대 리디아 왕국의 크로이소스 왕은 당시 저명한 철학자였던 솔론에게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
"크로이소스 폐하, 당신은 나에게 행복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나는 70년은 장수라고 생각합니다. 그 26,250일 중, 어떤 날도 같은 날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완전한 우연의 연속입니다. 행운과 불행은 항상 뒤섞여 있습니다. 고요하던 날씨가 회오리바람으로 순식간에 변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여정에는 무한한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신들은 질투심이 많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행복을 언뜻 보고는 파멸에 빠집니다. 당신은 운이 좋고, 놀라울 정도로 부유하고, 많은 사람들의 군주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좋은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나쁜 일도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하게 인생을 마감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는 겁니까?" 크로이소스는 솔론의 말에 잘 수긍이 가지 않았지만 나중에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키루스 대왕(성경에 나오는 고레스왕)에게 패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기다리는 순간에 그 말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흥망성쇠가 있고 결국 죽음에 임박했을 때에야 그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세계의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는 이 원자가 합쳐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면서 자연의 모든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이 원자론을 믿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 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과도한 쾌락에 끌리지 않음으로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죽음의 두려움 등 정신적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마음의 평정 상태에 이르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육체적 고통은 배고픔과 목마름 같은 결핍과 질병으로부터 오며, 정신적 고통은 신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는 순간의 고통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남겨질 가족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원자들의 집합일 뿐이며, 죽음은 몸을 이루는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 죽음과 동시에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고통 없는 삶의 질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생존에 꼭 필요한 의식주에 대한 최소한의 욕구는 충족시켜야 하지만 고급 음식이나 사치품에 대한 욕구 같은 것들은 필요한 욕구의 충족을 능가하는 쾌락을 주지 못하며, 부, 권력, 명예 등에 대한 욕구는 부자연스럽고 불필요한 욕구로서 채울수록 오히려 더 커지며 결코 완전히 충족될 수도 없고 그 욕구를 채우려고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생존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다면 우정의 공동체 안에서 진리를 함께 탐구하는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가르쳤다. 즉 지속가능한 쾌락인 몸과 마음의 평온한 상태의 행복을 추구하라고 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인간의 행복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말했는데 신이 인간 중 가장 현명한 자라고 칭한 솔로몬 왕은 그의 말년에 쓴 인생론인 전도서에서 이렇게 설파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3:22)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가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9:9)."
즉, 인간의 행복은 자기 일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가정 안에서 배우자와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붓다는 인생이 고통인 이유는 어떤 것들을 좋아해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하던지 어떤 것들은 싫어해서 자신을 해치면서까지 증오하는 어리석음에서 발생한다고 했다. 그래서 무엇에도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고통을 없애는 길이라고 하면서 몸이 아프지 않는 것이 건강이듯이 행복은 짜릿한 쾌락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비관주의자로 여겨지는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행복은 몸과 마음이 괴롭지 않은 상태이며 동시에 삶이 권태롭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조언했다.
"짧은 우리네 인생에
긴 욕심일랑 잘라내라
말하는 새에도
우리의 시새운 세월은 흘러갔다
내일은 믿지 마라
카르페 디엠(오늘을 붙잡아라)"
현대 철학자 하이데거는 사람들은 자신이 본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진단했다. 사람들은 매일 염려와 심려로 타인들과의 격차를 줄이려고 하던지 또는 격차를 더 넓히고자 하는 생각으로 세상 속에서 비 본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적 차이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우리가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죽음을 앞서 가보고 단지 한정된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자신임을 직시하고 살아갈 때 지금의 세상과 사물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여 살 수 있어 매일의 삶을 감사와 경이감을 가지고 본래적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광대한 우주가 138억 년 동안 만들어낸 기적의 총화인 한 존재로서 비록 1백 년도 안 되는 찰나의 시간을 사는 한 생명으로 존재하다 사라질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오늘 이 순간이 소중하기에 새벽 3시에 깨어서 이 질문들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이제껏 잘 살아왔는가?
2. 지금 내 곁에는 무엇이 남아있는가?
3. 지금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지?
4. 올해 내가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선다면 후회할 일은 없는가?
5.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