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4편
이슬 되어 살고 싶다/ 황기철
2025년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해다. 호주 이민 3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그리스 아테네 출장은 그 이민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고대 역사가 숨 쉬는 도시에서 나와 다른 현대 그리스인들을 보고, 만나면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노상 카페에서 여유롭게 앉아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외국에 왔음을 실감하게 하였고,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때 거의 일중독에 빠져 있던 내겐, 근무시간에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바이어와의 미팅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우린(직속 상사와 함께) 정장 차림으로 사무실을 방문하였는데, 그곳 바이어는 티셔츠 차림으로 일하다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좀 무례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거래가 성사되었고, 바이어는 우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성공적인 미팅을 자축하며 언제 그런 마음을 가졌냐는 듯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호텔에 돌아와 캐주얼 복장으로 갈아입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갔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턱시도에 파티복 차림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하면서 격식 차리는 우리와 놀면서 격식 차리는 바이어.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문화의 차이였다. 결국 어디에 사느냐의 문제였다. 근본적인 삶의 방식에 관하여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던 내게, 다른 어떤 것을 삶의 중심으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호텔에서, 한국의 성수대교 붕괴사건 기사가 실린 조간신문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신문을 잡은 손이 떨렸다. 그런데 그런 기운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내면으로 흐르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문화충격 상태에서의 사고 소식은 평소와 다른 태도로 사고를 해석하게 되고, 어떤 새로운 파장이 나를 감싸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며칠 전, 기원전 432년에 지어진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왔는데, 준공 후 고작 15년 만에 붕괴된 다리는 너무나 허망한 것이었다.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은 전형적인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귀국 후, 이런 충격이 채 가시지 전 어느 날, 신문에 난 조그마한 광고가 눈에 박혔다. ‘호주, 뉴질랜드 이민설명회’ 광고였다. 광고지를 오려 호주머니에 넣고 퇴근하였다. 아내에게 그 광고를 보이면서 “우리 이민 갈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물었는데, “그래, 가볼까?”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광고에 기재된 설명회 날, 아내와 함께 가 이민 설명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이민서류를 작성하고 사인을 하였다.
1995년 11월 12일, 호주 브리스번 공항에 도착했다. 답사 한 번 없이 아내와 4살 그리고 2살의 아이들과 함께 미지의 땅에 첫 발을 내디뎠다. 며칠 간의 답사보다 몇 년간의 경험을 들은 후 정착할 도시를 결정할 생각으로, 그 당시 호주 브리스번과 시드니에서 석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돌아와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선배를 찾았다. 그는 브리스번을 추천해 주면서, 브리스번 사람들이 드세지 않고 친절하여 나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내가 사회사업(Social Work)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고, UQ( University of Queensland)의 토니 교수를 찾아가 보라고 했다. 이렇게 정착할 도시를 정하고, 일요일에 도착하는 것으로 출발 계획을 잡았다.
공항 입국장을 막 빠져나오는데, 어디서 “황기철 씨”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민자를 돕고 정착 정보를 제공해 주었던 CES(Commonwealth Employment Services)라는 기관이 있어 그 기관을 통해 관련 정보를 주고받았다. 출발 전 나의 도착날과 시간, 그리고 항공 디테일을 명시하여 공항 픽업을 원한다는 팩스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어 공항픽업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국인 대학원생 부부를 보낸 것이었다.
두 차 트렁크에 짐을 가득 싣고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픽업비를 내밀었는데, 그들은 내 손을 부끄럽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CES에서 픽업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 픽업비를 받는 것보다 더 의미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들 부부는 CES에서 근무하는 지인의 부탁으로 나왔던 것이다.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스스로 차를 수리할 정도로 절약하며 생활하고 있는 부부였는데, 픽업비 사양은 적지 않은 포기였을 것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은 우리와 그들을 지속적으로 연결해 주는 끈끈한 연결 고리가 되었다. 그 후 작은 선물로 고마움을 표하고,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호텔 체크인 후, 한인교회에 갔다. 공항에서 호텔 가는 길에 우연히 한글로 표기된 교회간판을 보고 발견한 교회였다. 예배 후 오늘 도착한 이민자라고 소개했다. 한 노부부가 다가와 “그럼 살 집이 필요하겠네요, 정해둔 집 있나요?” 없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신의 집을 렌트 놀 생각인데, 와 보라면서 그날 자신의 집을 보여주었다. 지은 지 5년 된 수영장이 갖춰진 3 베드룸의 단층집이었다. 꿈에서나 상상했던 수영장 있는 집이라니 정말 맘에 들어 곧바로 오겠다고 했더니, 호텔에 일주일 예약하고 왔으니 호텔에 머물면서 원하는 다른 집을 알아본 후에 결정하라고 조언해 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곳은 시티 주변의 유닛(한국의 연립주택 같은 형태)이었다. 그런데 그림 같은 집을 보고 온 후 그런 집들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결국 일주일 동안 집 구경만 하고 그 집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노부부의 새로 짓고 있는 집의 준공검사가 지연돼, 그분들과 함께 사는 기간이 길어졌다. 덕분에 우리는 침대며 식탁이며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나 가구를 따로 장만하지 않고, 있는 것을 사용할 수 있어 좋았다. 보통 이민 오면 컨테이너로 부친 이삿짐이 도착할 때까지 조그만 박스로 밥상을 대신하곤 하였는데, 우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이민 노하우를 매일 전수받으면서 조금씩 새로운 이민의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겼고, 나에게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이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랜드 할머니(아주머니를 아이들 시선으로 그렇게 불렀다)의 생일임을 알고 깜짝 선물, 생일케이크를 사기 위해 열차를 탔다. 전화번호부를 뒤져 가까운 열차 역 부근에 빵집이 있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열차역에서 내리면 금방 사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려보니 아무런 상점도 보이지 않고 해는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가고, 어둠이 금방 몰려왔다(한국에서는 해가 져도 금방 어두워지지 않은데 여기는 곧바로 어둠이 짙어진다).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었다. 한참 후 차 한 대가 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세웠다. 사정을 얘기했더니 빵집이 좀 멀리 있으니 태워주겠다고 하여 차에 탔다. 정말 그 시간에 걷기에는 불가능한 곳에 있었다. 내리며 고맙다는 말을 하는데, 가지 않고 그냥 서있길래 내 말을 잘 못 알아들었나 생각하며 땡큐-우- 악센트를 넣어 말해도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다가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얼른 사 오세요, 열차역까지 다시 데려다 줄게요” 하지 않은가. 정말 더운 밤 시원한 빙수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이틀 전, 노부부는 새 집의 준공검사가 떨어져 그 집으로 들어가고, 다음날 우리의 이삿짐이 도착했다. 일부러 그렇게 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참 그런 우연도 없었다. 휘파람을 불며 이삿짐을 풀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중년의 여자였다. 문을 열어주자 그분은 “혹시 지갑 읽어버리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아뇨”라고 대답했더니 지갑을 보여주면서 “이 지갑, 당신 것 아닙니까?”하였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던 지갑이 그렇게 다시 내 손에 쥐어진 것이다. “안에 있는 것 다 그대로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라면서 건네주었다. 고맙다는 말도 잊은 채 지갑을 살펴보고 있는 사이 그녀는 “그것은 당신의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연기처럼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때야 얼른 뛰쳐나가 고맙다는 말을 겨우 전해주었는데, 쇼핑센터의 카트에 있는 지갑을 발견하고 안을 보니 주소가 적혀 있어 가져왔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왔는지, 길에서 기다리는 차를 타고, 손 흔들며 떠나는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차 등록 번호를 적어두었다.
그 지갑은 작은 노트 크기의 지퍼가 달린 지갑으로 현금은 물론 여권을 비롯한 중요한 서류들이 들어있었다. 고마움을 전할 방법이 없을까 궁리 끝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하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마 그분은 그것으로 그분의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할 것이니 그냥 고마운 마음만 간직하라면서 인적사항은 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설날, 지역 신문에 이 사건을 포함하여 그동안에 고마움을 베풀어 준 많은 분들께 큰 절을 올린다는 내용의 기고를 한 것으로 대신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항상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한 번은 마땅히 물어볼, 행인이 없어 정류장에 서있는 버스기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런데 버스 안에 있는 기사와의 거리 때문이었는지, 호주 남자들 특유의 발음 때문이었는지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 기사는 버스 시동을 끄고 버스에서 내려 앞장서 내가 찾고자 하는 곳을 안내해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서까지 안내해 줄 필요는 없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우리를 안내해 주고 천천히 버스로 돌아갔다.
랜드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로 지은 집으로 가고, 우리는 한국에서 온 이삿짐과 새로 구입한 냉장고, 세탁기,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들로 빈자리를 채웠다. 이들 중 직접 매장에서 구입한 것도 있었지만 전화로 구입한 것들도 있었다. 전화로 구입할 때면 바니라고 부르는 분의 도움을 받곤 했다. 바니는 랜드 할아버지의 가까운 지인으로 집 짓는 일 등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은퇴한 대학교수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수시로 우리 집에도 와 특히 전화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바니는 한국말을 못 했기 때문에 영어를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바니는 우리의 형편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 문법위주의 영어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듣고 말하기가 특히 부족했지만, 바니처럼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는 영어는 이해할 수 있었다.
랜드 할아버지의 집은 우리 집과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그 집은 하천부지의 땅에 지었는데, 원래는 집을 지을 수 없는 땅이었지만 한국에서 건축회사의 임원으로 일한 경험으로 땅을 돋우어 집터를 조성하여 집을 지었다. 그렇게 지은 집이라 넓은 텃밭을 만들었고 인접한 하천에서는 민물장어를 잡기도 했다. 난 수시로 그 집에 갔다. 차 마시며 얘기하는 것도 좋았지만 텃밭의 잡초 뽑는 일이 특히 좋았다. 잡초는 가꾸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뽑고 뽑아도 왜 그렇게 끊임없이 나오는지, 잡초는 나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스승이었다. 마음속에 자라나는 잡초 같은 것들, 그것들을 뽑아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지나고 있던 어느 날, 아마 3-4개월쯤 지났을 때, 집에 도둑이 들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골드코스트에 있는 한글학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곤 했는데, 도둑들이 우리의 토요일 패턴을 파악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삿짐차로 가장하고 왔을 것이다. 밤에 돌아와 그 사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조사를 마친 후 우리에게 조언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둑은 새 가전제품들을 구입하면 그것을 노리고 또 올 것이니까” 참 어이없는 충고였지만,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 UQ 근처로 이사를 결행했다.
선배가 소개해 주었던 토니 교수를 미리 만나 Graduate Diploma, Social Planning 준 석사 과정을 공부하도록 안내를 받은 터라 그곳을 택한 것이다.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파트타임 일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CES에서 “Wanted a strong man for gardening(가드닝 할 튼튼한 남자 구함)”이란 다소 유머러스한 광고를 보고 가드닝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이었는데, 할아버지는 주로 의자에 앉아 생활하고, 할머니가 주도적으로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80세 초반의 할머니였는데, 초등학교 교감으로 은퇴하여 철도 관련 박사 논문은 쓰고 있다고 했다. 그 집에서 내가 하는 일은 할머니와 함께 잡초도 뽑고 트림(trim)을 하고, 집안 청소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모든 일을 늘 함께 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모닝 티 시간을 가졌다. 어떤 때는 나의 대학원 과제를 봐주기도 하면서, 모닝 티 시간이 일한 시간보다 더 길기도 했다. 그날 과제에 대한 도움을 다 줄 수 없을 경우에는 다음 주에 정리한 내용을 내게 전해주면서 설명해 주기도 했다. 나중에 보니 가드닝 도우미로 나를 고용한 할머니가 나의 과제 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드닝 하면서 가르쳐 주었던 잡초의 이름은 다 잊었지만, 유머 넘치고 자상했던 할머니, 그 얼굴의 미소와 가드닝 하느라 나무뿌리처럼 굵어진 손가락을 잊을 수 없다.
토니 교수는 호주에 도착한 지 한 두 달 후에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헝클어진 머리에 무릎이 나온 청바지를 입고 있던 그는 양복 차림의 나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시선에 나를 이해한다는 공감과 따스함이 서려 있었다. 교수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해 주면서 나의 선배인 제자 얘기며 나의 공부계획 등을 나누었다. 정식으로 입학 허가를 받고 처음 출석했던 날, 강의실에서 그는 나를 자신의 “Brother”라고 동료 학생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어느 날, 나의 비즈니스 플랜을 듣고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심지어 비즈니스를 셋업 하는 과정을 과제로 대체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그때,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이 호주에 와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단순한 유학생이란 생각보다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들을 돕는 마음으로 영어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을 가르치며 Social Work을 실천하겠다는 나의 포부를 들은 토니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책, “With Head, Heart and Hands”를 학교명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좋아했다. 그렇게 탄생한 학교가 HHH International College였다. 한국에서 Social Work 전공 학생들이 우리 학교에서 그룹으로 공부할 때는 학생들을 대학에 초청하여 특강도 해주고 대학 투어도 해 주었다.
연방정부에 등록된 정식 교육기관인 영어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Social Work mind로 영어를 잘 가르치려면 무엇 보다도 따뜻한 마음의 능력 있는 선생님들을 영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만약 그런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면, 영어학교 설립에 관한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러면 학교 설립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TAFE(기술전문대학)에서 나를 가르쳤던 영어 선생님 중에 가장 실력 있는 선생님, 준(June)을 만나, 나의 계획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 중에서 나의 비전을 나눌 만한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QUT( Queensland University of Technology)의 영어 프로그램 책임자를 포함한 4명의 시니어 선생님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믿었지만, 그들이 가르친 한국학생이 있으면 그 학생들을 통해 선생님들의 실력을 한 번 더 검증을 받고 싶었다. 다행히 선생님들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분에게 전화를 해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그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런 실력자들을 모셨다니, 이제 브리스번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겠어요.” 나는 그들의 실력을 신뢰하게 되었고, 몇 번의 미팅을 통해 그들과 비전을 함께 나누기로 하고, 학교 설립부터 함께 하기로 했다.
June은 학교 설립 다음 해에 우리 학교에 조인하여 나와 마지막까지 12년을 함께 했다. 그녀는 GFC(Global Financial Crisis) 여파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고, 학교 파산으로 인하여 내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아무 조건 없이 재정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나의 힘든 모습을 가까이서 본 그녀는 몇 주 후 내게 이메일을 보냈다. “내가 빌려준 돈 다 받았으니 갚지 않아도 된다”는. 그때 학생들은 보험으로 대부분 구제를 받았지만, 나는 June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친한 친구도 친척도 선뜻해주기 어려운 도움을 준 그녀는 이민 초기부터 지금까지 나의 멘토로 든든하게 함께하고 있다.
하나 같이 친절하게 이방인인 나를 도와주고 반겨주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아니었으면 나와 우리 가족이 어떻게 이 낯선 곳에서 잘 정착할 수 있었을까. 돌아보면 30년은 그들에게 진 빚의 시간이었다.
이런 특별한 만남과 도움에 관한 에피소드를 얘기하면 사람들은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들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는데 2019년 우버 택시를 하면서 꼭 그렇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19년, 여기서 태어난 막내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업의 부도를 맞고 어두운 터널을 막 벗어날 때라, 아내와 나는 가진 돈은 없었지만 열심히 일해 유학비용을 대주기로 결정했다. 아내는 카페에서, 나는 하던 일에 우버 택시까지 겸하여 밤낮으로 일했다.
우버 택시는 코비드 팬데믹으로 6개월 밖에 하지 못했지만 수 천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이민 초창기에 경험했던 고마운 사람들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고, 현재의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초창기 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여러 사람들과 부딪힐 기회가 많았지만 비즈니스를 시작한 후로는 일과 관련된 사람들 외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우버 택시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좁은 차에서의 만남은 우선 공간적으로 특별한 장소였다. 사람들의 몸짓, 말투, 태도와 기운이 그대로 느껴지는 제한된 공간이 주는 특별함이 있었다. 가끔 뒷자리에 앉아 침묵으로 일관한 사람, 자신의 일에 골똘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앞자리 운전석 옆에 앉으며, 그들이 먼저 Hi, Hello, G’day mate, Hello Sir 등의 인사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소개는 물론 동승한 사람까지 소개하면서 차에 타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무슨 일로 어디를 가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혹은 말 트기가 어려우면 날씨 얘기를 시작으로 이야기의 살을 붙여갔다. 일상적인 얘기가 자신의 생각, 심지어 느낌까지 나누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승객들에 대한 대체적인 느낌은 친구 같은 편안함이었다. 그래서 때론 돈 번다는 생각보다 사람이 만나고 싶어 우버 앱을 켜고 기다린 경우도 있었다.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가족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를 잊을 수 없다. 그녀는 법원 옆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탔다. 집에 잠깐 들렀다 와야 한다면서 차를 탄 이유와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질문하는데, 오늘은 몇 시에 시작했느냐, 바빴느냐, 다 좋은 손님들이었느냐, 한국에 전화하면 어머니가 하시곤 하던 질문을 하였다. 내리면 금방 끊을 수 있는 가는 줄로 다가오지 않고 동아줄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다 보면,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논두렁을 가는가 했는데, 오토바이에 태워 가속 페달을 밟은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대학원에서 가족법을 전공했다고 말했을 때는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처럼 얘기 꽃을 피우더니 목적지에 도착하고서도 하던 얘기를 다 끝내지 못해 정차한 상태로 한참을 머문 적도 있었다.
선배가 만났던 사람들은 1980년대 사람들이었다. 이민 초기에 내가 만난 사람들은 1990년대, 그리고 우버를 통해 만난 사람들은 2019년의 사람들이었다. 2022년 총선거에서, 한국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같은 곳의 브리스번 세 선거구에서 녹색당 국회의원들이 당선되었다. 선배가 말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과 무관한 듯 변치 않았다.
언젠가부터 한국에서 브리스번으로 돌아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이곳도 제2의 고향이 되었으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의 생김새가 어떻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특별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소개했지만, 오히려 아무것 남기지 않고 등산로에서, 동네 산책길에서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던진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다정한 눈빛, 제스처, 그것은 갈증 난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것들이었다. 그로 인하여 나는 투명인간처럼 살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늘 존재감을 느끼며 살 수 있었다. 이슬은 밤새 소리 없이 살며시 풀잎에 와, 생명을 주고 낮이 되면 없는 듯 사라진다. 이슬처럼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브리스번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다 쓰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호주에서의 삶은 빚진 자로 살아온 세월이었다. 이슬 먹고 자란 풀처럼, 나는 그 이슬로 인하여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이민 30년, 이젠 나도 이슬 되어 살고 싶다. 나도 모르게 풀을 적셔주고 해가 뜨면 조용히 사라지는 이슬처럼.
눈물/ 황기철
슬픔이 밀어낸 눈물
금방 나오기도 하지만 몇 달,
몇 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슬픔 너무 깊어서
몸에 난 상처의 피는 금방 나오는데
마음에 난 상처의 눈물
상처 난 마음 달래며 나오기 때문이다
한 번에 다 씻기지 않아
조금씩 조금씩
시간의 타월로 씻으며 나오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오는 것은
막혔던 출구가 뚫렸을 뿐
눈물은 장사(壯士)
장승처럼 굳어 있던
몸과 마음 움직이게 하는
눈물로 씻겨진 마음의 상처는
기름진 흙
마른 막대기에도 싹이 나게 하는
우울증/ 황기철
경운기도 없던 시절
리어카가 있었지만 좁은 길 가려면
져야 했던 지게
울퉁불퉁 꼬불꼬불 비 오면 또랑인 길
작대기 짚어도 다리 후들후들
짐은 기우뚱기우뚱
제 아무리 무겁고 힘들다 해도
가다 지치면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고
집에 오면 벗어놓고 단잠 잘 수 있었는데
유령 같은 인생의 짐 홀로 지고
더러는 잠 못 이루고 폭식하고 불안해하고
세상과 담쌓고 한강 다리 떠올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지워지는 짐
차라리 지게로 질 수만 있다면
행인마저 알아보고 냉수 한 그릇 떠주었을 것을
특별한 문제없었나요?/ 황기철
“십이만 km 서비스지요, 특별한 문제없었나요?”
“네, 없었어요”
당신은 특별한 문제없었나요?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묻는 사람도 고쳐줄 사람도 없다
사 년 된 차에게는 8번이나 물었는데, 나에게는
누가 언제 그런 질문했는지 기억이 없다
생각해 보니 차에게 질문하지 않았다
나를 부리는 누군가에게 했겠다
나를 부리는 이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인 척 나를 부리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욕망은 아닐까? 원시를 살기에 최적화되었던
생존과 번식의 본능은?
만약 그들에게 물었다면, 아마 그들도
‘특별한 문제없었다’고 대답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