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4편
다육이 잎 하나/ 호선자
나는 남편과 함께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아왔다.
열두 살, 열 살
처음 어미를 잃은 어린 새 같은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는 함께
지지고 볶으며
스무 해를 건너왔다.
중학교 2학년이던 해,
한국에서 온 딸이
어느 날 우리 가족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되었다.
다섯 살에 나와 떨어져
한국에 남았던 아들은
어린 나이에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하며 살아왔다.
지금은 네 아이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을 살고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너희는 너희 삶을
잘 살아가고 있구나.”
조금이라도
걱정을 내비치면
아이들은 말한다.
“엄마,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위로하는 엄마가 아니라
위로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마흔 후반에 들어섰을 때
내 삶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에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끝없이 우울했고,
무기력했고,
허무했다.
‘이게 인생일까.’
‘나는 이렇게
삶을 정리하게 되는 걸까.’
그 질문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한
분노가 되었고,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하루하루
바닥보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손주들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서 울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아니야,
그러면 안 돼’라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부딪혔다.
나는 유튜브 강의를 붙잡고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검색했다.
한국의 상담기관,
시드니의 상담사들을 찾아다녔지만
내 마음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 상담사를 만났고,
만남이 이어지면서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내 상태가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회복에는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아주 천천히
나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그 무렵,
상담학이라는 공부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를 더 알고 싶어 졌고,
더 이상
나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디플로마 2년 과정.
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부정해 왔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못해.”
“나는 안 돼.”
하지만
공부를 이어갈수록
그 말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는 할 수 있다.”
새벽마다
과제를 끌어안고
버거운 날들도 많았지만,
최선을 다해 제출하고 나면
세상 어느 것도
부럽지 않았다.
그 순간의
가벼움과 성취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재제출을 여러 번 했다고 했지만,
나는 2년 동안
재제출 한 번 없이
과정을 마쳤다.
교수님의 칭찬 앞에서
부끄러우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잘했다.
정말 잘 살아냈다.”
오늘,
회사 화단에서
직원 한 명이 무심히 놓아둔
다육식물의 잎 하나를 보았다.
그저 잎 하나였던 그것이
어느새
완전한 형태의
새끼 다육이를 키워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잎 하나가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고,
하나의 생명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는 어떤 영양분을 먹고
여기까지 자라왔을까.
무너졌던 시간들,
버텨낸 새벽들,
포기하지 않았던 마음들.
아마 그것들이
내가 먹고 살아온 영양분이었을 것이다.
올해부터
나는 또 다른 2년을 시작한다.
기대와 함께
여전히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늦어도 괜찮다는 것을.
나는 지금도
조용히 자라고 있다.
나는 완성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자라기 위해 살아간다.
나는 충분해 / 호선자
50년을 사는 동안 나는 늘 남보다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생일이 1월이라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동급생들 대부분이 나보다 한 살이 많다 보니 괜히 기가 죽었고, 늘 어딘가 뒤처진 듯한 마음으로 학교생활을 했다.
여상을 졸업하고는 엄격했던 아버지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곧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일 년 후 결혼을 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어 가정을 돌보고 일까지 하며 바쁘게 살다 보니 또래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거의 없었다. 다른 학부모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해,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30대 초반, 우연한 계기로 호주에 오게 되었다. 외국 생활도 처음이었고 영어도 전혀 못 하던 나에게 이곳은 마치 고학력의 똑똑한 사람들만 모여 사는 세상처럼 보였다. 한 살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처럼 어리둥절한 날들이 이어졌고, 나는 그들과 전혀 다른 세계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같았다.
몇 년 전부터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렸고 마음은 우울과 무기력에 잠겼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했지? 어떤 말을 들을 때 마음이 환해졌지?’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는 요리를 할 때 가장 행복했다.
새로운 레시피를 찾아보거나 낯선 음식을 맛볼 때면 그 맛을 기억해 두었다가 식구들에게 다시 만들어 주곤 했다. 다들 맛있다고 칭찬해 줄 때면 내 마음도 함께 따뜻해졌다. 특히 한식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 요리는 늘 배움의 세계다. 생각지도 못한 재료와 방식이 만나 전혀 새로운 맛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경험할 때마다, 나는 나만의 일품요리를 만들어 가는 창조자가 된다.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 2년 전부터 요가와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나이가 들수록 잘못된 습관과 자세가 몸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 틈으로 병이 찾아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쓰지 않던 근육을 움직이느라 온몸이 아팠다. 운동 다음 날이면 험한 산을 다녀온 사람처럼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몸이 조금씩 풀리는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운동하러 가기 싫고 귀찮은 날도 많았지만, 눈뜨자마자 운동복을 입고 마음의 준비를 하니 그 불편한 마음도 서서히 옅어졌다.
몇 주 전 남편과 함께 요가 수업에 갔을 때, 강사가 이런 말을 여러 번 따라 하게 했다.
“I am enough.”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 깊숙이 꽂혔다.
그래, 나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지금까지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왔고, 오늘도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도 내가 사랑하는 요리를 연구하며 많은 사람에게 작은 기쁨을 나누고, 꾸준한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돌볼 것이다.
I AM ENOUGH!
썬야의 봄 / 호선자
십 대에는
친구와 떡볶이 먹으며
마냥 즐거웠지
이십 대엔
너무 일찍 인생의 쓴맛을
맛보아 버렸어
삼십 대에는
낯선 세상에서 어리둥절
허우적거렸고
사십 대엔
끝도 없는 넓은 세상을
원 없이 보았어
어느덧 오십 대
썬야의 늦은 봄이
이제야 오려나 봐
비바람을 이겨낸 후
꽃과 열매로 마주하길 바라며
예쁜 씨앗을 심기로 했어
서호주 들판에 휘날리던
이슬 맺힌 들꽃들이
정말 보기 좋았거든
너도 그랬구나 / 호선자
새벽녘 바다의 해는
아침노을과 함께 떠올라
찬란한 빛을 자랑하다
곧 사라졌어
나의 젊은 청춘의 날도
그렇게 지나가 버렸지
파도가
힘차게 밀려오고 있었어
그 힘이
그대로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강한 파도도
서서히 사라져 갔어
나도
젊은 날의 힘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그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져
해도
파도도
그리고 나도
너도,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