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홍

작품 3편

by 김동관

다시 찾은 고향/ 이재홍


오랜만에 내 고향 영동에 다녀왔다. 지난 2019년 말에 다녀왔었는데, 그때는 내가 뇌출혈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인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았다. 아침에 호주로 짐 하나를 부치고, 내 고향 자계리를 찾았다.


아내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류장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다만 그곳에는 젊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전에 예정대로 차가 도착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무료였는데, 우리만 현금으로 삼천 원을 냈다.


예전에 가던 길은 영동에서 묵정리까지는 매끈한 포장도로였고, 도덕리까지는 털털거리는 비포장도로였다. 산 아래 도덕리에서 내리면, 꾹 참고 있던 차멀미 탓에 토를 하느라 먼지가 가물거리는 완행버스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외할머니 댁은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아니, 어려움은 사실 그때부터였다. 세 시간여 비탈길을 걸어 높은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


그때 나는 누구와 그 길을 다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까, 아니면 너무 힘들어서였을까. 1970년 중반쯤이었는데 말이다. 드디어 산등성이 고개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는 제법 커다란 돌탑 하나가 쌓여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지금은 바람과 함께 그곳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버스를 타자마자 이미 맨 뒷자리밖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노신사께서 자계리에 왜 가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외할머니께서 샛담에서 하숙집을 하셨고, 자계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묵었으며, 그곳이 마침 나의 출생지이기도 해서 찾아가는 길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분이 깜짝 놀라셨다. 자기가 바로 그 초등학교 소사였다고 했다. 맙소사. 나도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늘 ‘소사, 소사’ 하시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때는 학교의 일꾼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학교의 서무 선생님이었다.


소사 아저씨는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잘 알고 계셨다. 우리 외가와 같은 임씨였는데, 본은 달랐다. 강원도에서 열일곱 살에 우연히 이곳에 와 소사를 하게 되었고, 결혼도 여기서 하고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90년대 학교가 폐교된 뒤 영동으로 나왔다가, 아이들 시집·장가 다 보내고 다시 자계리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했다.


차가 도덕리를 지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십여 분을 오르고 다시 십 분쯤 내려간다. 산중턱, 멀리 능선을 따라 첩첩산중을 구경하라는 듯 쉼터 하나가 있다. 그리고 급격한 내리막길, 그 끝자락에는 옛적에 재무시(GMC)가 굴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길은 1970년대에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비포장도로였고, 차는 도덕리까지만 다녔었다. 예전에는 두 시간여 걸리던 길이 지금은 차로 이십 분 남짓이다. 참 많이 달라졌다.


이윽고 차가 멈추었다. 내가 꼬마였을 때의 그 소사 아저씨는 팔십 대 후반의 노신사가 되어 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다음 정류장은 샛담, 바로 윗동네 자계리였다. 하차객은 우리뿐인 줄 알았는데, 낯선 노인 한 분이 함께 내렸다. 농사일 때문에 대전에서 왔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온다고 했다.


내 기억 속 샛담에는 집이 다섯 채쯤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중 지금도 나를 기다리는 것은 큰집에 남아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한 채뿐이었다. 내가 태어난 외할머니네 집도 새로 바뀌어 있었다. 그마저도 집주인은 없고, 자물쇠가 대신 나를 맞았다.


큰집 할아버지네 소 절구통, 집들을 잇던 작은 오솔길, 산중턱에서 흘러 시냇가로 내려가던 작은 냇물…. 마을 길은 하얀 시멘트로 잘 포장돼 있었지만, 마을 앞 냇물에는 접근로가 없어 시원한 물을 그저 눈으로만 담아야 했다. 예전에는 큰 바위에 누워 물가에 쉽게 다가갔는데, 그 바위마저 찾을 수 없었다.

온통 과수원뿐이었다. 고개 너머 마을로 가던 길을 찾으려다 입구에 선 농장 건물과 지키는 개를 보고 포기했다. 나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서 나를 반겨 주는 것은 시원한 물소리뿐이었다. 나는 그 소리라도 잊지 않으려 숨죽여 들었다. 작은 피라미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나의 동네 찾기는 한 시간 남짓 만에 끝났다.


차 시간을 보니 우리가 타고 온 차가 다시 돌아올 때였다. 서둘러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아내와 함께 아랫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예전에 자계리에 오기만 하면 무섭게 들리던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달려가던 곳이다. 아랫마을은 예전엔 서른 가구쯤 살았는데, 지금은 열댓 가구 노인들만 남아 있었다. 빈집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쓸쓸함과 옛정이 함께 흘렀다.


냇물은 아랫마을에서도 시원하게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접근로가 마련되어 있어 팔과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와, 물빛과 시원함은 옛날 그대로였다. 물가에 핀 코스모스가 예뻐 보여 아내에게 사진 한 장을 찍어 주었다.


정류장으로 돌아가려는데 멀리서 한 할머니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는데, 할머니가 우리가 누군지 묻는다. 알고 보니 샛담 다섯 가구 중 유일하게 남아 계신 순득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여든여섯이었는데, 공기 좋은 시골 덕분인지 피부가 참 고왔다. 자식들은 대도시에 나가 살다가, 몇 년 전 이곳이 좋아 다시 돌아와 살고 있다고 했다. 기억력도 놀라울 만큼 좋았다. 스무 살에 서울에서 이 촌구석으로 시집왔을 때부터 최근 일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영동 어머니에게서 우리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용산초등학교에 가려고 들판에서 소리치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야기를 한참 하던 할머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차 시간이 다 됐다며 빨리 가라고 했다.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잠시 후 할머니가 다시 돌아와 시간을 잘못 봤다며 미안하다 하시고, 말린 고추와 대추를 한 움큼 싸 주시며 어머니 드리라고 하셨다.


스무 분쯤 남았을까. 오전에 만났던 분을 다시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분은 다름 아닌 외삼촌의 육촌 형님이었다. 예전 같으면 어머니가 방 하나를 내주셨을 텐데. 그 자리에서 외삼촌과 통화하다 나를 바꿔 주었다. 세상은 참 좁았다.


세 시 사십 분, 버스가 도착했다. 순득이 할머니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랐다. 큰 완행버스는 어느새 거의 노인들만 실어 나르는 버스가 되어 있었다. 모처럼 받은 현금이 반가웠는지, 버스는 참 잘도 달렸다. 조금도 털털거리지 않았다.


샛담, 자계리, 다시 큰 고개, 마섬, 도덕리, 묵정리를 지나오는 동안 싱그럽게 잘 달렸다.


나는 오늘 자계리를 다녀왔다. 언제나 그렇듯, 자계리를 다녀오면 아주 먼 곳을 다녀온 느낌이 든다. 마치 꿈속의 나라라도 다녀온 것처럼. 그곳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제는 거의 내 마음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내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언젠가 그들마저 모두 떠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곳을 고향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때 자계리는 과연 무엇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리운 그곳/ 이재홍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아내와 함께 2주간의 휴가를 내어 캔버라를 찾았다.

캔버라에는 볼거리가 참 많았다.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전쟁기념관, 여러 뮤지엄, 국립도서관, 내셔널 갤러리까지, 도시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기념관 같았다.


이십 년 넘게 호주에 살았지만, 브리즈번만 벗어나면 왠지 모를 어색함이 따라왔다. 그래서 호주에서 수도를 찾은 것도 사실은 전적으로 아내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어찌나 춥던지, 자꾸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수많은 명소가 아니라, 마지막 날 우연히 마주친 도서관 앞 키 큰 나무들이었다. 꼿꼿하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그 나무들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문득 저려 왔다.


지금과는 많이 달라 보이는 고향, 우리 동네는 사실 꽤 그럴듯한 곳이었다. 지방자치가 실시되면서 수많은 군수들이 오가고, 풍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나는 집에 갈 때마다 눈을 감고 다른 그림을 그려본다. 옛 풍경의 그 길들을.


집에서 오 분만 걸으면 큰 시냇물이 있었고, 그 시냇물을 따라 아람들이 늘어선 미루나무 길이 나왔다. 그 길 건너편에는 큰 군청이 있었고, 삼거리 막다른 곳에는 파출소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영동의 마차다리가 있고, 건너편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나는 바로 이 길 위에서 자랐다.

엄마가 여름 냇물에 목욕하러 갔을 때 라면땅을 사게 십 원만 달라고 졸랐던 그 길도,

엄마가 자궁암에 걸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을 견뎌야 했던 그 길도,

누군가 초코파이를 한 상자만 선물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던 그 길도,

나무 밑에서 주운 작은 지갑을 파출소에 갖다 주고 학교에서 몇 주 동안 소식을 기다렸던 그 길도,

영동 장날이면 이모(친구 엄마)의 생선가게에서 고등어를 사려고 장으로 가던 그 길도,

모두 그 미루나무 길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내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어린 시절을 살았다고 오해하며 지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분명 즐거운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중학교 3학년, 영동을 떠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기억의 배경에는 언제나 포플러 가로수들이 서 있었다.


지금의 영동에는 더 이상 나의 동네가 없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키 큰 미루나무들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파출소도 사라졌고, 대장간도 물론 남아 있지 않다.


호주에 와서는 미루나무를 잊고 살았다. 호주와 미루나무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 아마 너무 바쁘게 살아오느라 잊고 지냈던 것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록새록 솟아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다시 미술을 시작하며 그려본 그림 속, 키 큰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모습처럼.

그곳에는 여전히, 내가 그리워하는 그 길이 서 있었다.



2025년 마지막 모임 후 소회/ 이재홍


QLD 문학회회원 여러분, 어느덧 또 한 해가 지나갑니다. 올 한 해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특히 차금자 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 분, 김광연 님.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찾아주셔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1월 발표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호주 곳곳에서 소식을 전해주시는 김동관 님, 다들 언제쯤 도착하실지 무척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어제 미국에서 막내 따님과 사위님이 오시는 바람에 참석하지 못한 황기철 님, 못 뵈어 아쉽지만 참 부러운 소식입니다. 그리고 어제 참석해 주신 정제인 님, 귀한 찬조금 100불이나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년에도 꼭 나와 주실 거지요? 제게 2025년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습니다. 10여 년 넘게 이힘든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해오신 분들을 생각하니 존경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무엇보다 올 한 해 제가 QLD 문학회 회장을 맡아왔지만,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문학회 진행이나 감상평 등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부분에서 여러분께 충분한 즐거움을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입니다. 사실상 회장 역할을 도맡아 주신 주덕빈 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러분 각자의 기억 속에는 2025년이 어떤 그림으로 그려져 있나요?


항상 차분하고 조용한 미소로 반겨주시는 손성훈 님, 그리고 송정은 님. 넓은 시골집에 갈 때마다 그곳의 호수는 잘 있는지 늘 궁금합니다. 캥거루와 앵무새 등 많은 동물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덕빈·유인희 님, 지난 20주년 기념일에 해주셨던 그 멋진 강의가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내년에는 더 자주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주덕빈 님의 '룰루' 사랑은 정말 보기 좋습니다. 앞으로도 '룰루 이야기' 연재를 꼭 부탁드립니다.

박상동·정은주 님, 은퇴 후 새로운 삶을 일궈가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내년에는 얼른 집도 완공하시고, 두 분의 골프 실력도 일취월장하시길 응원합니다. 아, 그리고 노래 실력이 출중하신 정은주 님,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그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김동관·호선자 님, 덕분에 우리 모두 호주 구석구석을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바쁘시더라도 늘 곁을 지켜주시는 호선자 님을 잘 챙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따님의 수고를 덜어주려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을 챙기시는 호선자 님의 정성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옿해 상담사 자격을 취득하신 것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정종원·김수경 님, 우리 문학회의 유일한 '사랑나비' 한 쌍! 올해도 감사했습니다. 특히 먼 이국땅에서 어머님의 마지막 길을 잘 배웅해 드린 두 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는 김수경 님, 글 대신 맑은 토요일이 아주 많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황기철 님, 언제나 조용한 미소로 함께해주시는 황기철 님. 바쁜 와중에도 학업을 마치시고 상담사 자격까지 취득하신 모습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덕분에 우리 문학회가 장소 걱정 없이 모일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이동훈 님·린다 신 님, 언제나 조용하지만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사랑스러운 시와 편지, 그리고 만날수록 다정한 린다 신 님, 어제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년에도 웃음이 가득한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오선희 님, 이재홍 님. 아, 바로 저희 부부네요^^. 내년에도 여전히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이겠지만, 우리에겐 QLD 문학회가 있지 않습니까? 멋지게 잘 살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5년, 회장인 듯 아닌 듯 그렇게 보낸 이재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