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7편
나오미 스시여, 안녕!/ 정은주
오늘은 저 자신에게 마음껏 칭찬을 건네고 싶은 날입니다.
“그동안 수고했다, 정말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십이 년째 운영해 오던 스시 가게를 드디어 내려놓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 고객의 99퍼센트가 백인인 시내 한복판 가게에서,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며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뿌듯함을 품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민 1세대가 대개 그렇듯, 낯선 언어와 다른 문화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으로 부딪히며 버티는 것뿐이었습니다. 영어도, 특별한 기술도, 재능도, 정보도 없이 그저 일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시작한 세월이 어느새 11년을 넘어 12년째에 이르렀습니다. 제 오십 대의 전부를 이곳에 쏟아부은 셈입니다.
아직은 더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세 번째 계약을 3년 남겨 두었지만, 건강도 생각도 조금씩 한계를 알리는 듯했습니다. 예순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지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는 늘 무엇엔가 쫓기듯 바쁘게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알람을 맞춰 본 적 없이 그 시간이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고, 평일 아침에 여유롭게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핸드드립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는 일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제 육십 대마저 이 작은 가게 안에 갇혀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조금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어졌습니다.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싶다는 마음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고, 결국 그 마음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다음 한 주가 지나면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당신네 카레가 내가 먹어 본 것 중 최고야” 하며 엄지를 들어 보이던 고객,
“테리야끼 치킨은 브리즈번에서 제일 맛있어”라며 매일 먹고도 밥 한 톨 남기지 않던 사람,
아침 이른 시간마다 치킨 아보카도 스시와 허니칠리치킨 스시를 꼭 한 개씩 사 가던 단골,
점심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가라아게 노베지를 주문하던 손님들….
그들은 제가 열정을 잃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해 준, 저를 최고의 셰프라고 믿어 주며 자부심을 선물해 준 참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도 그들의 얼굴을 보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세상을 뒤집어 놓았을 때, 특히 음식점이 직격탄을 맞았을 때는 직원들 걱정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모두가 우리 가게에서 받는 임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장사가 안 되니 직원을 줄여야 할 상황이 닥쳤습니다. 누구 하나 괜찮지 않았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아무도 내보내지 않고 모두가 근무 시간을 조금씩 나누어 줄이는 길을 택했습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항공편이 풀리고, 직원들이 한 명씩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홍수로 만들어 둔 스시가 거의 팔리지 않았던 날도 있었습니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나누어 주고, 직접 차에 싣고 배달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손으로 빚어 만든 스시 하나하나가 제 시간이고 마음이었기에,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스시 가게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일도 이제는 없을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새로운 스시를 만들어 내면 그것을 흉내 내어 보던 일도 더는 없을 것입니다. 손님들이 우리 가게를 스쳐 지나가실 때 서운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순간들도 이젠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저의 오십 대는 흘러갔습니다.
다음 주가 되어 모든 일을 완전히 마치고 이곳을 떠나게 되면, 제가 만들던 스시도, 익숙했던 주방도, 잠시 앉아 쉬곤 하던 책상도 더 이상 저의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또 다른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저 자신뿐일 것입니다.
정들었던 나오미 스시여, 안녕.
중년의 패션과 삶/ 정은주
나이가 들면서 어떤 옷을 입어도 마음에 들지않고 전에는 잘 어울렸던 색깔도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본다. 옷장 안을 들여다 보면 많은 옷들이 걸려 있지만 막상 외출하려고 하면 정작 입을 옷이 없다.
이전에 했던 머리 스타일도 마음에 들지않고, 사진을 찍으면 인상이 칙칙하고 나이들어 보여 언제부터인가 사진찍는 것도 싫어하게 되었다. 중년이 되면 당연히 피부 톤도 바뀌고 머리 숱이 적어 지면서 얼굴 형도 변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계속 이전의 나만을 고집하다 보니 마음만 우울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먼저 지금의 자신을 인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면서 옷차림에 약간의 변화를 준다면 나만의 멋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옷장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면서 센스를 갖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 보면서 나름대로 중년의 옷차림과 멋에 대해 몇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옷차림의 센스는 먼저 색의 조합에 있다. 상의와 하의의 색의 조합이 주는 멋은 상당하다. 예를 들면 상의가 밝으면 하의는 중간톤으로 한다든지, 상의가 색이 있으면 하의는 뉴트롤(화이트, 베이지, 그레이)톤이 좋다. 상의와 하의가 둘다 진한 색은 중년에게는 최악의 조합이다. 이것만 지켜도 벌써 중년의 패션센스가 달라 보인다. 또 중년이 되면 나온 배와 힙을 가리고 싶어 상의를 크게 입거나 길게 입는 경우가 있다. 박스 스타일이나 넉넉하게 힙을 가릴 정도로 크게 입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뚱뚱해 보이거나 키가 짧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오히려 벨트를 사용해서 위, 아래를 분명하게 나누어 주고 상의는 짧게 입으면 훨씬 날씬해보이고 키가 커보인다.
또 나이들어 생기는 목주름을 가리고 싶어 폴라나 라운드를 많이 선호하는데 오히려 브이 넥을 입으면 목도 길어 보이고 조금 날씬해 보이는 착시 현상도 있다. 그리고 스카프나 벨트를 많이 활용하는 것도 멋을 살리는 방법의 하나이다.
멋진 중년이 되기위해 이런 저런것들을 스터디 하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알아야 나에게 어울리는 패션을 알 수 있다.
옷차림은 단순히 밖에 보여지는 것뿐 아니라 삶을 대변해 주고 어떻게 살아 왔는지 보여 주는 삶의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중년의 아름다움은 가장 '나' 다운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심리학자 조앤 버틀러는 사람의 인상은 옷차림이 7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상대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옷차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도 해보기 전에 옷차림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해 짐작하고 추측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옷차림은 그 사람의 삶의 표현이며 가치관을 나타내기도 한다. 중년의 아름다움은 비싼 옷이나 명품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나를 알고 내가 하는 선택과 조화에서 온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멋을 생각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돌봐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만 했던 것을 시도해 보아도 되는 시기이다. 작은 변화를 주면서 새로운 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곧 출발하는 여행을 앞두고 지금까지 알게 된 몇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변화될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작은 쇼핑을 시작했다. 여행은 중년여성에게는 회복의 시간이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나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시간이다. 낯선 공간에 자신을 투영하는 시간이기때문에 나의 가치를 나타내고 표현해 줄 옷을 찾고 싶다. 과하지 않게, 절제된 곳에서 나만의 매력을 찾아 보려 했다.
이옷 저옷을 시도해 보면서 내게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옷들의 조합이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색다른 모습의 나를 보고, 웃고 행복해 하는 것을 보면서 멋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번에 '나의 멋'을 찾기 위한 프로젝트는 작은 옷차림의 변화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은 앞으로의 또 다른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스스로를 꾸미는 것은 삶의 자존감을 끌어 올린다고 생각한다. 이번 옷차림에 대한 관심을 통하여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나의 존중을 입는다’라는 생각으로 옷차림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다.
이제는 나를 존중하기 위해 옷을 입어보려 한다.
여행이 주는 휴식/ 정은주
여행은 나에게 가장 따뜻한 휴식이다. 특별히 작년 연말에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 온 모터홈 여행을 하게 되었다.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일 년에 한 번 크게 쉬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 예전에는 그 시기가 되면 부모님과 형제들, 친구들을 만나러 한국에 가는 것이 연례행사였지만,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코로나로 인해 호주 밖으로의 여행이 금지되면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
몇 달 전 캠핑카를 고르고 예약하던 순간부터 내 마음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차를 결정하고 사진으로 마주했을 때 가슴이 설레었고, 모터홈 파크를 예약할 때에는 마치 그곳에 이미 도착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JY 부부와 함께하는 여행이어서 기대가 더욱 컸다. 호주에 살며 유일하게 이어 온 한인 모임에서 만난, 형제와도 같은 부부이다. 함께 여행을 계획하며 한편으로는 설렘이 컸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불편함이나 작은 불화가 생기지는 않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에도 조금은 자신이 생겨 이런 여행에 도전할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은 우리의 상황과 나이를 고려해 무리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도록 짜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어디든 달려가 밤을 새워도 될 것 같았지만, 이미 인생의 후반부를 달리고 있는 우리는 무엇보다 무사히 여행을 마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첫날은 차 안에서 짐을 정리하느라 긴 시간을 보냈다. 마치 새집으로 이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첫 목적지인 번야 마운틴을 향해 출발하자,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양옆으로 보였다. 그 순간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마주 앉은 Y와 그동안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형제자매, 주변 사람들 이야기까지 끝이 없었다. Y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치 할머니에게서 6·25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낯설고 신기했다. 그런 세월을 지나오며 그녀가 늘 타인을 위하고 베푸는 삶을 살게 된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
중간에 잠시 쉬어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며, 이번 여행이 참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번야 마운틴에 도착해서는 맑은 공기와 장엄하고 아름다운 국립공원을 산책했다. 함께 오지 못한 친구들이 떠올라 아쉬웠지만, 각양각색의 텐트와 캐러밴을 보며 캠핑이 힘들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도 내려놓게 되었다. 언젠가 꼭 다시 오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곳에서 이틀을 보낸 뒤 로마로 향했다. 파랗게 물든 하늘과 군데군데 떠 있는 구름이 마치 그림 같았다. 다시 끝없는 평야가 펼쳐졌고, 도로는 기대 이상으로 잘 닦여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세 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로마는 의외로 아기자기한 도시였다. 길가에는 보틀 트리라는 항아리 모양의 나무들이 심겨 있었는데, 도시의 특성을 살리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틀을 머물 예정이었지만 도시는 생각보다 더 조용하고 한가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간의 여유가 조금은 낯설기도 했다. 수영을 하며 동심으로 돌아가 보기도 하고, 가만히 앉아 시골 냄새를 즐기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두 시간가량 산책을 하며 도시 전체를 돌아보았다. 낮에는 뜨거운 날씨였지만 우연히 발견한 멋진 카페에서 찬 커피를 마시며 한나절을 보냈다. 시골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크고 근사한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참 달콤했다.
이틀 후,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인 카나본 고지를 향해 출발했다. 일곱 시간을 달려야 하는 긴 여정이라 운전자를 위해 파이팅을 외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밖에는 비가 내려 긴장도 되었지만, 차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덕분에 여행은 오히려 더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들판이 지루할 법도 했지만, 그마저도 우리를 설레게 했다. 중간중간 쉬며 커피를 마시고 식사를 하니 무료할 틈이 없었다. 사진도 가끔 찍었지만, 가능하면 눈과 마음에 담으려 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뚫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 드디어 캠핑장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차와 텐트로 가득 찬 그곳에서 숲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주변을 산책하며 몸속에 쌓였던 낡은 것들을 하나씩 내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계곡을 따라 난 작은 길을 걸으며 자연에 감사했고, 전망대로 오르는 길을 발견했을 때는 숨겨 둔 보물을 찾은 듯했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펼쳐진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장관이었다. 호주의 심장이라 불리는 에어즈락을 옮겨 놓은 듯한 바위산이 병풍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슬처럼 내리는 비로 산허리까지 구름이 드리워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했다. 아기띠를 한 젊은 부부, 어린아이들과 함께 오르내리는 가족들, 또 친구끼리 온 여행자들을 만날 때마다 묘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모두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사람과 장소가 온전히 쉼과 기쁨이었다.
마지막 목적지인 레드클리프로 향하던 길에는 사진에서나 보았을 법한 낙원 같은 호수를 만났다. 온갖 새들이 나무마다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디에서 셔터를 눌러도 한 장의 화보가 되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 앉아 있자 마음이 벅차올랐다.
한 해의 끝과 새해의 시작을 여행지에서 보내며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아쉬움 속에서도 다가올 또 다른 여행을 꿈꾸며 도시로 돌아왔다. 참으로 행복한 여행이었다. 그 행복은 무엇보다 함께한 동반자들이 더없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행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청춘은 한 편의 소설/ 정은주
40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로 인해 이번 한국 방문은 무척이나 기다려졌다. 혹시 못 알아보면 어쩌나, 친구들이 서먹하면 어쩌나, 설마 실망하지는 않겠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분주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동아리에 가입할 기회가 생겼을 때 나는 당연히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 온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방송반에 들어가리라 생각했다. 방송반 시험이 있던 날, 한 시간가량의 시간이 비어 우연히 친구를 따라 중앙대 청룡합창반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라 여겨 별 관심이 없었는데, 들어서는 순간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졌다. 서클룸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여기저기에서 기타 소리에 맞춘 노래가 흘러나왔고, 거기에 멋진 화음까지 더해져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서로 눈을 맞추며 부르는 노래는 소리 이상의 감동을 주었고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시험 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의 갈등은 커졌다. 나가야 하나, 그냥 여기에 남을까. 사실 합창반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곳이라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다 결국 남기로 했고, 그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방송반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그날 그렇게 동아리에 가입했다.
대학에서의 동아리는 비슷한 성향의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끈끈한 결속과 묘한 동족애로 뭉쳐 있어서인지, 나는 빠른 시간 안에 그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강의가 비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서클룸에 들르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동아리 단합을 위해 처음으로 엠티라는 것을 갔다. 아마 대성리였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함께 밥을 지어먹고 통기타를 치며 유행가를 부르고, 밤에는 통나무를 태운 모닥불 곁에서 시를 낭송했다. 저마다 대학생활의 포부와 낭만을 이야기하느라 밤이 가는 줄 몰랐다.
잠깐 눈을 붙이고 맞이한 이른 아침, 물안개 자욱한 강가의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때 모자를 눌러쓴 남학생 하나가 기타를 메고 와서는 함께 배를 타자고 했다. 배를 탄다는 신기함에 망설임 없이 올라타 노를 저었다. 강가에서 조금 떨어졌을 때 그 아이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나를 향해 불러 주는 노래는 무척 감미로웠고,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것이 그 아이와의 추억의 시작이었다.
동굴 속 울림 같은 멋진 목소리와 반짝이는 까만 눈을 가진 그 남학생은 언제나 너그럽고 따뜻한 내 편이 되어 주었다. 포커와 당구를 즐기던 꽃미남 친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고, 조금은 까칠하지만 속은 한없이 여린 소년도 있었다. 음대 여학생의 악기를 대신 둘러메고 다니던 미성의 친구, 동글동글한 얼굴에 늘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던 아이, 쌍꺼풀진 큰 눈으로 항상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아이, 듬직한 체구에 말투까지 어른스러웠던 아이,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주머니 돈 쓰기를 아끼지 않던 따뜻한 선배들까지. 그중에서도 나의 분신 같았던 단짝 친구는 짝사랑하던 남학생 때문에 자신의 대학생활을 아낌없이 헌신했다.
이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엠티와 여름 농촌 봉사활동, 하계수련회는 대학생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그들은 인생의 시작을 함께한 동지와도 같았다. 축제 때 연극영화과 학생에게 파트너 제안을 받고 그들만의 화려한 파티에 갔다가도 애프터를 거절하고 서클룸으로 달려가 친구들과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떤 학생이 강의실까지 찾아와 나를 데려가려 했을 때도 서클 친구들이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울고 웃으며 영원할 것 같던 대학생활은 동기들의 입대와 졸업, 취업으로 서서히 막을 내렸다. 이후로 정신없이 살다 보니 그 시절의 소중함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이 몹시 궁금해졌고, 그리움이 사무치기 시작했다. 십여 년을 찾아 헤맸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다가, 우연히 페이스북이라는 매체를 통해 근황을 알게 되었다. 그들과 다시 연결되던 순간, 소름이 끼칠 만큼 기뻤다.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확인했고, 사진을 마주했을 때는 반가움에 한참을 울먹였다.
이번 여행은 바로 그런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드디어 만나기로 한 날, 또다시 마음이 복잡했다. 가능하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게, 간단한 액세서리와 옷, 신발까지 하나하나 신경 쓰며 지나치지 않으려 애썼다. 먼저 단짝 친구를 만나 학교를 둘러보기로 하고, 가장 찾기 쉬운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바로 앞에 택시 한 대가 서더니 하얀 부츠가 먼저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다.” 확신이 드는 순간 그녀가 내렸다. 우리는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울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 그녀가 내 앞에 있었다. 이게 꿈이 아니기를 바라며 한참을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못 만났던 거야?”
서로를 바라보며 여전한 말투와 포근함에 안도했고, 안부를 나눈 뒤 곧장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가는 곳마다 긴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학교 정중앙의 청룡연못과 청룡상은 왜 그리 작아 보이던지. 그 시절에는 무척 크게 느껴졌었는데, 정문 앞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니 변한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세월이 우리를 그만큼 자라게 한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 우리는 그때도 자주 가던 ‘안동장’에서 거의 40년 만에 얼굴을 마주했다. 서로의 달라진 모습과 시간의 흐름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한 사람씩 안아 주는데 가슴이 벅찼다. 나의 걱정과 염려는 기우였다.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웃고 울다 보니 우리는 금세 스무 살 청춘으로 돌아가 있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조금은 중후해진 몸매에도 말투와 목소리, 행동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식사 후에는 자연스럽게 노래방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노래방을 처음 가보는 나를 위해 그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를 찾아주느라 친구들은 한참 애를 썼다. 그들은 여전히 화음을 주고받으며 어떤 노래든 명품으로 만드는 재주꾼들이었다. 그렇게 회포를 풀었지만 아까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밤이 깊어 헤어질 때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위안을 삼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친구들을 남겨 두고 공항에서 보름달을 보았을 때, 달빛이 유난히 스산해 보였다. 아마 내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는 듯했다. 이제는 서로의 소식을 묻고 답하고, 사진을 주고받고, 좋아하는 노래를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다음에는 청춘의 시작이었던 엠티를 함께 가자고 약속도 했다. 이렇게 우리들의 청춘은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지나간 여고 시절 / 정은주
한국에 다니러 갈 때마다 여고 동창 모임을 갖는다.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모습들이 여전히 친구들 안에 남아 있다. 만날 때마다 우리는 “어쩜 너 하나도 안 변했다”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아닌 줄 알면서도, 학창 시절 양 갈래 머리에 빨간 베레모와 교복을 입었던 모습이 기억 속에 또렷해서 여전히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 시절의 선생님들과 친구들, 서로 알고 있는 추억과 사건들이 자연스레 이야깃거리가 된다. 점심시간마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넓지 않은 운동장에 모여 선생님과 학생들이 손을 잡고 추던 포크댄스는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최고의 추억이다. 그때 멋진 몸매와 높은 코가 멘델스존을 닮았던 음악 선생님의 춤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2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손은 내 손 위에, 다른 한 손은 어깨춤에 얹고 왼발을 앞으로 쭉 뻗던 그 멋진 모습이 아직도 사진첩 속에 남아 있다.
3년 내내 반장을 했던 나는 지금도 친구들 사이에서 ‘반장’으로 불린다. 그 덕에 합창대회에서는 지휘를 했고, 학부모님을 모신 학예회에서는 사회를 보았다. ‘문학의 밤’을 준비할 때는 원고를 청탁하러 남학교에 갔다가 휘파람 세례를 받기도 했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았던 덕분에 전 학년 핸드볼 대회에서는 골키퍼를 맡아 준우승을 했다. 결승전에서 최선을 다해 3학년 언니들의 공을 막아 내던 장면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마지막 해에 열렸던 ‘성심 바자회’에서는 부모님과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고, 학교에서 마련한 작품과 물품들을 소개하며 팔기도 했다. 그 행사는 전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 주었다. 방과 후마다 일기를 검사하시던 담임선생님은 눈, 코, 입이 한 곳에 모여 있다고 해서 ‘모여라 삼총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셨다. 자상하시면서도 훈육의 말씀을 많이 해 주셨는데, 잔소리 같았지만 진심 어린 애정이 담겨 있어 미워할 수 없는 우리들의 대장이셨다. 나에게는 1년 내내 짝사랑의 대상이기도 했다.
비록 1년에 한 번뿐인 만남이지만, 어제도 만난 것처럼 수다스럽고 친근한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가장 순수하고 풋풋했던 시절에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뛰어난 미모를 가졌던 H는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을 가 멋진 디자이너가 되어 돌아왔고, 공부를 잘했던 S는 이대를 졸업한 뒤 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지금은 학원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일하고 있다. 야무지고 똘망똘망했던 K는 역시 이대를 졸업한 후 엄격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 자신의 꿈보다는 가풍과 남편 내조에 맞추어 지금도 바쁘게 지낸다.
의류학과를 졸업한 O는 의사 남편을 만나 내조하느라 자신의 일을 못했다며 가끔 한탄하지만, 든든한 친정 덕분인지 여전히 큰소리치며 씩씩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당시 국어를 제일 잘했던 J는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지금까지도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대할 뿐 아니라, 모임에서 사서삼경이나 고전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곤 한다. 그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하면 “내가 이럴 줄 몰랐지?” 하며 스스로도 대견하다는 듯 웃는다. 그녀가 참 자랑스럽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유명 작곡가이셨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해마다 내게 한 박스씩 책을 정리해 보내준다. 먼 타국에서 문학회 모임을 한다는 친구에게 뭔지 모를 공감과 격려를 전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자신도 읽지 않은 새 책들을 온라인으로 주문해 보내왔다. 참 고마운 친구다. 예전에는 한국에 갈 때마다 몇 권의 책을 사 오는 것이 큰일이었다.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아까워서 몇 번씩 되읽곤 했는데, 요즘은 언제든 새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많이 소홀해졌다. 그녀를 떠올리며 새로운 마음으로 책장을 정리해 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교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작은 도서실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꿈도 가져 본다.
이제는 희어진 머리와 약간 주름진 이마, 거칠어진 손마디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지만, 그 시절을 떠올리며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는 우리는 여지없이 열일곱 여고생으로 돌아간다. 그런 친구들이 있었기에,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들이 계셨기에 나의 여고 시절은 꽃보다 더 아름다웠다.
“어느 날 여고 시절 우연히 만난 사람,
변치 말자 약속했던 우정의 친구였네…”
엄마 일등 할래요!/ 정은주
호주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기부(donation) 문화였다.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자발적인 기부를 권하는 테이블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서핑 협회의 기부 안내였다. ‘Save Life Donation’, 즉 생명 구조를 위한 기부였는데 처음에는 무척 의아했다. 정부 보조도 있고 회원들의 회비도 있을 텐데, 굳이 기부까지 받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둘러보니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기부, 유기견 센터를 돕는 기부, Anzac Day에 이루어지는 기부 행사 등 수많은 나눔이 쇼핑센터와 거리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집에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해서 나가 보면 기부를 권하는 자원봉사자인 경우도 많았다. 어떤 부모는 아이를 직접 데리고 다니며 학교 와플이나 행운권을 팔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기부의 한 형태였다.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마다 거리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자선냄비가 대표적인 기부 행사다. 수해나 지진 같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는 미디어를 통해 모금 행사가 열리고, 사람들은 긴 줄을 서서 마련된 모금함에 손수 돈을 넣는다. 특별히 큰 금액을 기부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 신문이나 방송에서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호주에서 느낀 가장 큰 차이는, 기부가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아무리 작은 금액, 1달러나 2달러를 기부해도 반드시 영수증을 발급해 준다는 것이다. 그 영수증으로 나중에 세금 감면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제도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있어 사람들은 기부를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이는 듯했다.
처음에는 낯설고 약간의 거부감도 들었지만, 차츰 동참하게 되면서 나 역시 익숙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런 습관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학교 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다는 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가끔 머리를 삭발한 학생들을 볼 수 있다. 삭발을 하겠다고 약속하면 친구들로부터 기부금을 모으는 방식이다. 나는 머리를 자르지 않더라도 친구를 통해 기부에 참여할 수 있다. 때로는 금식을 통해서도 기부가 이루어진다. 6시간, 10시간, 하루나 이틀 금식을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 만큼 기부금을 내는 것이다. 딸아이가 고등학생 때 금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며 참 놀랐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것도 보았다. 며칠 후 열릴 기부 마라톤 대회를 위해서였다. 마라톤에서 1등을 해야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등, 2등, 3등 순서대로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지는데, 아이들은 그 영예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린다. 지나치게 열심히 연습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엄마가 “1등 하면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니 그만해라” 하고 말했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1등 할래요. 내가 가장 많이 해야 해요.”
그 말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1등은 공부나 경쟁에서만 의미가 있는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는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헌신해야 얻어지는 타이틀이었다. 그야말로 영예로운, 진정한 1등인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생활을 통해 어려서부터 기부가 몸에 배어 있어, 여기저기 놓여 있는 기부 테이블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남을 위한 일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제는 나 역시 이런 상황을 대할 때마다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작은 돈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내게 되었다. 이것은 내 삶의 여유를 서로 나누고 다른 이들을 배려함으로써,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을 배우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다.
'정'으로 살다 '박'으로 살아가기/ 정은주
내 성은 가문 있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진양 ‘정’씨이다. 사십여 년을 ‘정’씨로 살다가 호주로 이민을 온 이후 뜻하지 않은 혼돈이 찾아왔다. 호주에 생각보다 남성 위주의 제도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엉뚱하게도 결혼을 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다.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문화였다.
이곳에서 십여 년을 유학생 엄마로 지내다 2010년 무렵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이 나라의 법과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시민권 신청서에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박은주’라고 적어야 하는 줄 알았다. 남편이 말렸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너무 쉽게 성을 바꾸어 버렸다. 어쩌면 무의식 중에 ‘정은주’로 살아온 지난 시간이 조금은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디케어 카드와 운전면허증은 예전 이름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그렇게 별문제 없이 십여 년을 살아왔다. ‘박은주’라는 이름은 오직 여권에만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나는 여전히 정은주였다.
그러다 난데없이 전 세계에 코로나가 퍼지면서 문제가 생겼다. 각 나라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백신 접종을 일종의 신분증명서처럼 요구하기 시작했다. 해마다 다녀오던 고국 방문에도 제동이 걸렸다. 입국할 때마다 2주 격리를 해야 했고,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겨우 연말에 얻는 열흘 남짓한 휴가에 2주 격리는 여행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백신 접종 증명서가 있어야만 오갈 수 있었다.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메디케어에 접종 완료 확인을 요청했는데, 아무리 해도 서류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남편 것은 쉽게 발급되는데 나만 계속 막혔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다. 여권의 성과 메디케어에 등록된 성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성을 공식적으로 ‘박’으로 바꾸어야 했다.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많고 심사도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모든 과정을 남편이 대신 처리하면서 연신 짜증을 부렸다. 나 역시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박’으로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라 여기며 참았다. 한참을 기다려 인터뷰를 했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서류 보완이 필요하다는 통보였다.
다시 준비한 서류를 들고 찾아갔을 때, 맘씨 좋아 보이는 젊은 청년이 인터뷰를 맡았다. 그제야 서류가 통과되었고, 심사에 2주 정도 걸린다는 안내를 받았다. 마침내 성씨를 ‘박’으로 바꾸어도 좋다는 허가서를 손에 쥐었을 때, 묘하게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이제는 한국에 갈 수 있는 건가?’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이제부터 나는 ‘박은주’로 살아가게 되었다. 딸은 지혜롭게도 자기 성을 지키고 있다. 나도 그럴 수 있었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바꾸어 버린 이 성이 이제는 내 비석에 새겨질 이름이 되었다. 늙어서 불릴 이름이 아직은 낯설지만, 힘든 과정을 함께 견디며 남편과 살아온 세월에 보너스로 주어진 또 하나의 이름이라 여기니 마음이 새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