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관

작품 7편

by 김동관

맨손으로 건너온 길/ 김동관


1. 바다를 건너다

1987년 10월 4일.

나에게 이 날은 또 하나의 생일과 같다.

1963년 전라남도 나주군 다도면 판촌리 상판부락에서 태어난 내가, 스물넷 청년이 되어 처음으로 바다를 건넌 날이기 때문이다. 초가집 서른세 가구뿐이던 작은 마을, 마을의 가장 변두리에 감나무 열세 그루에 둘러싸여 있던 초가삼간 우리 집, 누런 소가 있던 마구간과 두엄 냄새가 섞여 있던 마당과 변소, 어린 시절 내 인생의 첫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8형제와 조부모, 부모님까지 열두 식구가 함께 살았다. 두 마지기 밭에서 고구마 오십 가마를 거둬 겨울을 나고, 두 마지기 논에서 쌀과 보리를 얻어 굶지 않고 겨우 살던 시절. 한 시간을 걸어 다도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나주 영산강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어 육 학년 때 광주로 이사했다. 효동국민학교로 전학 갔던 첫날, 시골에서는 우등생이었던 내가 80명 교실에서 받은 40등 성적표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어린 내게 처음 알려 주었다.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갈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1981년 서울로 올라가 영문과에 원서를 내고 왔다. 어머니는 맘 속으로 내가 대학에 떨어지길 바랐지만 합격을 해서 어렵게 50만 원 빚을 얻어 입학금을 내고 들어갔다. 첫 학기가 시작하고 두 달 만에 더 이상 생활비 보조가 어려우니 대학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 편지를 받은 다음 날 신입생 장학금 명단에 내 이름이 있어서 대학을 계속 다닐 수 있었고, 두 번째 학기부턴 근로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대학을 다니다 장래 진로에 대한 회의가 들어 3학년 때 군대에 갔고, 병장으로 제대한 뒤 복학 대신 호주 유학 길을 택했다.


미국이 아니라 호주를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유학생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제대 후 형님이 운영하던 킥복싱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일하며 토플(TOEFL) 영어시험을 준비했다. 여러 번 시험을 치른 끝에 호주 대학에서 조건부 입학허가서를 받았고, 처음 만든 여권과 6개월 비자를 손에 쥐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3개월 어학연수비 1백만 원과 편도 항공료 50만 원 그리고 유학원 알선료로 60만 원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호주행 비행기를 탔을 때 내가 가진 돈은, 도로에서 생선장사를 하시던 어머니가 친구분들께 빌려 주신 1백만 원과 ROTC복무 중이던 친구가 쥐어준 30만 원이 전부였다. 1987년 10월 3일 김포공항에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스물두 시간 만에 시드니 공항에 내리던 순간, 나는 혈혈단신 맨주먹의 청년이었다.


2. 오렌지로 가는 기차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 마중 나온 분이 데려다준 곳은 시내에서 기차 타고 1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한국 아저씨가 혼자 운영하던 하숙집이었다. 조그만 집에 17명이 있었고 한방에 5-6명씩 잤는데 이불도 베개도 제공되지 않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카펫이 깔린 맨바닥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카시미론 이불을 덮고 다 마시고 버린 4리터짜리 박스와인 봉지에 바람을 넣어서 베개대신 베고 잤다.

일주일에 하숙비 70불씩 주면서 영어학교를 2개월 다니고 나니 가지고 온 생활비가 반으로 줄었고 생활비를 다 써버리면 누구한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나는 불안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몸으로 때우는 일뿐이었다. 처음에는 시드니에서 일을 찾아보았다. 처음 1주일은 한국 사람이 식당을 만드는 일을 돕는 노가다 시다 일이었는데 당시 최저 시급이 8불이었지만 시급으로 4불을 주었다.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면서 앞으로는 한국인 밑에서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커미션 베이스로 집을 방문해 오일 페인팅 그림을 파는 일을 1주일 했는데, 5일은 공치고 한 사람에게 68불어치 판 게 다여서 이 일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87년 12월 성탄절 다음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가방 하나 챙겨 시드니 숙소를 나서서 농장이 있다고 하는 Orange라는 타운을 향해 가는 기차를 무작정 탔다. 당시엔 워킹홀리데이란 제도도 없었고 관광비자도 받을 수 없던 때라 정보도 없었는데 소문만 듣고 갔다.

시드니 센츄럴 역에서 출발해 5시간 후쯤 오렌지에 도착해 기차역 옆에 있던 Pub 위층의 낡은 호텔방을 1주에 $50 주고 얻은 후 다음날 시내 자전거 대여점에서 기어도 없는 자전거를 1주에 $20 주고 랜트해 농장을 찾아 나가 보았다.

자전거로 한참을 타고 타운 밖으로 나가 보니 체리 농장이 있어서 무작정 들어가 주인에게 체리를 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경험이 있냐고 해서 얼떨결에 있다 했다. 그럼 끝물이지만 남은 거라도 따 보라고 해서, 체리를 하나도 먹지 않고 하루 종일 땄더니 1킬로에 45센트씩 쳐서 45불 주었다. 그것도 다음날 하루 더 따니 더 딸 게 없었다. 그래도 이 틀 일해 80불 정도 벌었으니 일주일은 먹고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그런데 체리를 땄던 경험이 없어 손가락 힘으로만 아래로 잡아당겨 따다 보니 집게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렸다. 위 쪽으로 젖혀서 꺾어 따야 한다는 걸 경험이 없어서 그땐 몰랐던 거다.

다음날 정부에서 운영하는 Job centre에 가서 과일 따기 일을 구한다고 접수했더니 사과 따는 농장을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 보니 농장까지 거리가 두 시간이나 걸려 일하기를 포기해야 했는데, 배가 고파 식품점에 라면 하나 사러 갔다가 잡센터에서 보았던 한 호주인 남자를 만났다. 이 친구에게 그 농장을 소개해 주고 그 친구 차를 얻어 타고 작은 사과를 솎아내는(thinning)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급 $8씩 받으며 하루에 8시간씩 일을 해서 주 5일에 세금 떼고 $250 정도를 받았다. 경험이 없는 농장 일을 일주일 정도 하다 보니 호주의 작열하는 태양에 얼굴은 그을러 아프리카인처럼 까맣게 탔고 나도 모르게 코에선 코피가 터졌다. 하지만 일이 힘든 것보단 이 농장 일도 곧 끝날 것 같다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 땅에서의 삶은 누가 구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버텨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걸.


3. 다시 대학, 그리고 영주권

농장에서 3개월 동안 일을 한 후 잡센터 소개로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가 15개월 동안 일을 할 때 처음으로 호주가 노동자의 천국임을 체험할 수 있었다. 주 5일을 일하지만 4주에 한 번씩 하루 휴가가 있었고 일 년에 4주의 유급 휴가를 주었으며 일 년에 1주일은 유급 병가를 사용할 수 있었고 사용하지 않고 남은 날은 추가 휴가로 쳐 주었다. 공장의 일부가 폐쇄되었을 때 다른 도시의 공장으로 옮기길 원하는 사람을 지원받아 여행 경비며 모텔 숙박비와 심지어 식사비와 술까지 모든 경비를 지급했으며 그렇게 3주간 지내본 후 그곳에 있을 것인지 다시 돌아올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했었다. 단순 조립공에게 이런 모든 혜택을 주는 것을 경험하며 호주의 높은 노동자 인권에 감동했었다.

공장에서 3개월 후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공장 다니며 6개월간 저축한 돈으로 주택담보 대출이 가능한지 은행을 찾아가 문의하였는데 지점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준 후 은행 문 앞까지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고, 집 값의 95프로를 대출받아 방 2개짜리 작은 빌라를 구입할 수 있었다. 정말 사람을 최고로 대우해 주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았었다.

공장을 다니면서 야간엔 TAFE College에서 공부했었고 주말엔 도서관 시청각 실에서 나 혼자 영어학습 비디오 80여 개를 보면서 몇 개월에 걸쳐 마스터했었다. 그런데 어느 땐 그 좋은 도서관에 나 혼자 하루 종일 이용한 후 문 닫는 시간에 나올 때도 있었는데 나 만을 위해 큰 도서관을 열어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주고 직원까지 근무하는 것 같아 좀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었다.


1990년 나는 꿈을 찾아 Armidale로 이사해 대학을 1학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새벽엔 슈퍼마켓 청소를 하고 낮엔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다른 슈퍼마켓 두 곳의 청소권을 따 사업이 되었다. 매니저들은 내가 젊은 동양인이라고 해서 어떤 차별도 하지 않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만 보고 기꺼이 나에게 청소 용역을 맡겨 주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9명의 직원을 채용하여 청소와 트롤리 사업을 하면서 매주 상당한 돈을 벌어 저축할 수 있었고 1994년 3월 마침내 대학을 졸업했고, 한 달 뒤 기적처럼 영주권을 받았다. 그리고 맨손으로 호주에 발을 디딘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귀국해 내가 모든 경비를 지불하여 한국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4. 실패와 귀환

졸업 후 시드니에서 유학원을 열었지만 쉽지 않았다. 1996년 한국에 들어가 다단계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했고, 98년부터 영어학원 강사로 다시 일어섰다. 2000년엔 영어학원을 열어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그해 봄 아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 치료와 재발, 절망 속에서 나는 5년간의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2002년 3월, 영주권 만료 일주일을 남기고 이민 가방 여덟 개만 들고 다시 호주로 들어왔다. 병든 아내와 초등학교 3학년 딸, 1학년 아들을 데리고 브리즈번 공항에 섰을 때 나는 맨손의 서른아홉 가장이었다. 그날부터 진짜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다.


5. 혁필, 길 위의 세월

2004년 2월 2일, 아내는 4년간의 투병 끝에 37년 10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후 1년 반 동안 홀로 초등학생 남매를 키우며 분투하다 혼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재혼을 결심했다. 2006년 1월 재혼 후 민박과 정착 서비스, 교민 주간지 사업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2011년 우연히 혁필을 배웠고, 그해 11월 28일부터 길 위의 삶이 시작되었다.


2025년까지 14년간 호주 전역을 돌며 노마드 생활을 하면서 그림글씨를 썼다. 호주 대륙을 네 번 일주했고, 호주의 대부분의 도시와 타운을 다니면서 그림 글씨를 그려 팔았다. 그림 전공자도 아닌 내 글씨를 “Amazing!”하다며 사 주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매 번 감격했다. 누군가 한 점을 사 갈 때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일터로 향할 때 마음에 새긴 문장이 있다.

Expect nothing, Appreciate everything.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모든 것에 감사하자.


6. 코비드의 시간

2020년 3월, 세상이 멈췄다. 뉴질랜드에서 일하던 중 록다운을 맞아 급히 돌아왔고, 2년 동안 퀸스랜드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22년 3월 국경이 열리던 날, 나는 다시 길 위에 섰다. 예순을 앞둔 나이, 남은 인생을 다시 설계하라는 신호 같았다.


혼자 운전하던 어느 날, 외딴 도로에서 문득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이 길에서 사고라도 나면 가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을까. 휴대폰 셀카 모드를 켜고 유언처럼 중얼거리는데 눈물이 나면서 고향을 떠난 이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7. 뒤돌아보니 기적

스물넷에 혼자 낯선 땅 호주로 건너왔지만 38년이 지나 이제 나는 예순셋, 12명의 대가족을 거느린 추장이 되었다. 은행 대출은 아직 조금 남아 있어도 번듯한 집이 있고, 노후를 위해 사둔 5 에이커 킨가로이 농장엔 작은 창고도 하나 지었다.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맨손으로 온 내가 여기까지 왔다니.


경제적 자유는 아직 멀고 책임질 짐도 여전히 무겁지만 여기까지 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젠가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어 일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때가 온다 해도 나는 내 힘으로 일하며 떳떳하게 세금을 내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것이 이 나라가 내게 베풀어 준 은혜에 대한 작은 답례일 테니까.


8. Life continues

1987년 10월 4일, 두려움 속에서 내디딘 한 걸음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나는 작은 시골 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태어나 광주와 서울을 거쳐, 마침내 호주 대륙을 누비고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은 끊임없는 이동이었고, 꿈을 향한 여정이었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인생의 지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당신에게도 행운이 함께하길.

그리고 나의 길도, 오늘처럼 계속되기를.

Life continues.





자유의 노래,
Waltzing Matilda/ 김동관


오늘도 나는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만한 작은 Swag 텐트에서 잠을 잔 후 새벽 5시에 눈을 떴다.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잠들었는데, 어느덧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함께 아침노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 한 잔에 삶은 달걀 하나, 그리고 땅콩버터와 아보카도를 바른 토스트 위에 얇게 썬 양파와 오이를 올려 아침을 때웠다.

그렇게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는 오늘의 목적지인 Mt Isa 일요 마켓으로 향했다. 브리즈번을 떠난 지 나흘째, 붉은 태양이 떠오를 때 출발해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삼일 내내 끝없는 아웃백 들판을 건너 달려온 길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작은 테이블을 펴고, 사람들에게 그림을 그려 팔아서 여행 경비를 벌 계획이다.

Swag 텐트는 내 여행의 가장 충실한 동반자다. 스웨그 텐트만 있으면 비싼 숙박비를 내지 않고도 별이 쏟아지는 어느 평원 위에서도 잘 수 있다. 하루 이틀 Rest area에서 무료 숙박을 하고, 다음 날은 카라반 팍에서 텐트를 치고 샤워와 빨래를 한다. 이렇게 난 오늘도 조금은 불편하지만 자유로운 노마드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번 여행 중 Mt Isa로 향하던 길에 처음 와본 Winton이라는 작은 타운에서 나는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그곳이 바로 호주인들의 마음속에 “제2의 국가(國歌)”로 불리는 '월씽 마틸다'(Waltzing Matilda)가 태어난 곳이었다. 호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함께 부르면서 호주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그 노래 말이다.

Winton Visitor Centre의 Waltzing Matilda 기념관을 둘러보며 나는 이제껏 막연히만 알고 있던 이 노래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를 썼던 시인 반조 패터슨( Banjo Paterson: 호주 지폐 $10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음), 그에게 영감을 준 떠돌이 노동자들과 여인 크리스티나 맥퍼슨(Christina Macpherson),
그들이 이 노래를 완성해 간 이야기를 따라가 보았다.

1894년, 수년간 지속된 가뭄과 경기 침체 속에 농장주들은 양털 깎는 노동자(Shearer)들의 임금을 삭감했고 이에 항의하며 파업에 나선 노동 조합원들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노동자들 중 일부는 퀸스랜드 북서부의 Winton에 자리 잡은 Dagworth Station 농장에 모여 밤마다 불을 피우며 투쟁의 깃발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누군가가 Dagworth 농장 창고에 총알 한 발을 발사했고 농장주는 사람들을 모아 대치하며 20분간 교전을 벌였다. 교전 중 누군가 양을 모아둔 창고에 불을 질러 양털 20여 톤과 양 143마리가 불타는 사건이 있었다(현재 가격으로 약 20만 달러 피해 추정됨).
농장주들과 경찰은 방화자로 지목된 떠돌이 노동자 Samuel Hoffmeister(Frenchy라 불림)을 추적했고, 파업 노동자들은 Dagworth Station 안에 있던 Combo Waterhole 옆에서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있었다. 그때 Samuel이 일어나 주머니에서 편지를 한 장을 꺼내 읽은 후 그 편지를 불속에 던져 넣고는 이렇게 읊조렸다. "That done. I'm satisfied. 다 끝났어. 난 만족해." 그리고 캠프에서 20미터쯤 걸어가서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이 땅의 자유와 절망이 교차하던 한 시대의 초상이 되었다. (경찰을 데리고 형 Bob과 같이 사무엘을 잡으러 갔던 Dolald Macpherson도 나중에 죄책감으로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1895년 1월 여름, 시드니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던 시인 반조 패터슨은 약혼녀 Sarah Riley를 만나기 위해 Winton 지역의 큰 양 목장이었던 Dagworth Station을 방문했었다. 이 목장은 사라의 학창 시절 절친이었던 Christina의 오빠 Bob Macpherson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사라가 이곳에 초대받아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조는 여기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크리스티나는 몇 해 전 빅토리아주 워남불(Warrnambool) 경마장에서 들었던 스코틀랜드 행진곡의 선율을 지터(zither: 기타 음색을 가진 가야금 같은 악기)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현의 떨림이 방 안을 채우자,
반조 패터슨은 펜을 들어 전날 Bob에게 들었던 그 떠돌이 노동자 Samuel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크리스티나의 지터 선율 위에 한 단어씩 얹기 시작했다.
떠돌이 노동자의 노래,
자유를 향해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던 한 인간의 마지막 외침이 그의 시 속에 새겨졌다.

현실의 떠돌이 사무엘은 양털 창고를 방화한 혐의로 경찰에게 쫓겨 죽음을 맞았지만,
시인 반조는 그의 죽음을 '자유의 선택’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에게 ‘빌라봉’은 절망의 웅덩이가 아니라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이 흘러 들어가는 자유의 강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Waltzing Matilda’는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이 땅의 노동자와 떠돌이들의 존엄과 해방을 노래한 시였다.

며칠 뒤, 크리스티나는 인근의 또 다른 가족의 목장이었던 Oondooroo Station으로 옮겨 그 멜로디를 피아노 위에서 다듬었고, Waltzing Matilda 노래가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1895년 4월 6일, Winton의 North Gregory Hotel에서 퀸즐랜드 총리 Sir Hugh Nelson을 위한 만찬 자리에서 그 노래는 처음 불려졌다.
초원의 밤공기 속에서 울려 퍼진 월씽 마틸다 선율은 정치인도, 마부도, 떠돌이도 잠시 말을 멈추게 했다.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 호텔의 불빛 아래서 불린 그 노래가
훗날 호주의 모든 심장에 새겨질 줄은.
이 노래는 단지 멜로디가 아니라,
이 척박한 붉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이고,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반조가 처음 친필로 썼던 Waltzing Matilda를 여러 날 동안 한글로 번역해 보면서 나에게도 ‘마틸다’가 있고 내가 그 떠돌이 노동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내려앉은 캠핑장,
쿨라바 검트리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나도 월칭 마틸다를 불러보았다.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누가 나와 같이 방랑여행 떠날까?

WALTZING MATILDA
By A.B. "Banjo" Paterson (wrote in1895)
번역 by 김동관

Oh! There once was a swagman camped in the billabong,
Under the shade of a Coolibah tree;
And he sang as he looked at the old billy boilin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오! 옛날에 어느 떠돌이 노동자
빌라봉¹ 웅덩이 가에서 야영을 했다네
쿨라바² 검트리 그늘 아래 앉아
낡은 빌리³ 주전자에 물이 끓는 걸 보며 흥얼거렸지
“누가 나와 함께 마틸다⁴ 메고 방랑여행 떠날까?”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my darlin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Waltzing Matilda and leading a water ba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누가 내 사랑 마틸다와 함께 방랑의 춤출까?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마틸다 메고, 물주머니 하나 들고서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Down came the jumbuck to drink at the waterhole,
Up jumped the swagman and grabbed him with glee;
And he sang as he put him away in his tucker-bag.
“You’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양 한 마리 물 마시러 웅덩이에 나타났네
떠돌이가 벌떡 일어나 양을 붙들고 미소 지었어
자루 안으로 양을 밀어 넣고 노래했지
"나와 함께 방랑여행 가자구나"

Up came the squatter a-riding his thoroughbred;
Up came the policeman - one, two, three.
“Whose is the jumbuck you’ve got in your tucker-bag?"
"You’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곧바로 농장주⁵ 준마 타고 나타났네
경찰도 뒤따랐지 - 한 명, 두 명, 세 명
“자루에 든 양은 누구 거요?"
"나와 함께 방랑여행 가자구나"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my darlin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Waltzing Matilda and leading a water ba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누가 내 사랑 마틸다와 방랑의 춤출까?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마틸다 메고, 물주머니 하나 들고서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Up sprang the swagman, and jumped into the waterhole,
Drowning himself by the Coolibah tree;
And his voice can be heard as it sings in the Billabon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방랑자 벌떡 일어나 빌라봉 속으로 뛰어들었어
쿨라바 검트리 옆 웅덩이 물에 빠져 죽은 거지
지금도 그의 노랫소리 빌라봉에서 들을 수 있어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my darlin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Waltzing Matilda and leading a water bag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누가 내 사랑 마틸다와 방랑의 춤출까?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마틸다 메고, 물주머니 하나 들고서
누가 나와 함께 방랑여행 떠날까

참고
1. 빌라봉(billabong): 강물이 범람했다가 고여 생긴 고립된 물웅덩이. 호주 내륙에 있는 흔한 지형.
2. 쿨라바 나무(Coolibah tree): 호주 아웃백에서 자라는 유칼립투스(검트리)의 일종.
3. 빌리(billy): 야외에서 물이나 차를 끓일 때 쓰는 작은 금속 주전자.
4. 마틸다(Matilda): 떠돌이 노동자가 짐 보따리를 의인화해 부른 이름. “마틸다와 춤춘다”는 곧 ‘짐을 지고 방랑한다’는 뜻.
5. 농장주(squatter): 19세기 호주에서 대규모 목장을 차지해 양을 기르던 정착 농장주



두 여인의 슬픔/ 김동관

1. 붉은 들판 위의 새벽
1894년, 잔인한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새벽도 황야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 흙먼지 위로 구름 한 점 없던 하늘, 검붉은 태양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구간 옆을 돌며 양들을 살폈다. 이곳 Dagworth Station은 나와 동생 도널드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땅이었다.
도널드의 눈빛은 요즘 들어 자주 흔들렸다. 파업 중인 양털깎이 노동자들 때문에 매일이 긴장 속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분노에 휩싸여 창고를 불태우겠다고 협박했고,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날 밤, 양털 창고가 불길에 휩싸였다. 불꽃은 하늘까지 치솟았고, 양 143마리가 연기 속에서 스러졌다. 나는 그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Bob… 우리가 너무 몰아붙였던 건 아닐까.”
그날 이후 도널드는 그 말을 되뇌듯 중얼거렸다.
며칠 뒤, 불을 지른 독일 출신 떠돌이 노동자 사무엘 호프마이스터가 Combo Waterhole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스스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그의 품에는 메모 한 장이 남아 있었다.
That done. I’m satisfied.
도널드는 그 장면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거의 말을 잃었다.


2. 손님이 찾아오다
몇 달 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시드니의 시인 반조 패터슨이 이곳을 방문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내 오랜 친구였고, 사라 라일리의 약혼자였다. 사라는 내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학창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나는 그의 방문을 기꺼이 허락했다. 어쩌면 도널드의 어두워진 마음에도 한 줄기 바람이 들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여름, 그들은 1,200킬로미터의 먼 길을 달려왔다.
먼지를 뒤집어쓴 마차에서 내린 사라는 여전히 환했고, 반조는 어딘가 도시의 공기를 품고 있었다. 저녁이면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시골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널드는 말없이 불길만 바라보았다.
그때 크리스티나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작은 지터를 꺼냈다.
“Warrnambool에서 들었던 곡이에요. 그날 이후 자꾸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요.”
그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선율은 스코틀랜드 행진곡 Craigielea.
경쾌했으나 어딘가 깊은 그늘이 배어 있는 곡이었다. 반조는 한참 말이 없었다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멜로디엔 자유가 있군요.”


3. ‘마틸다’의 밤
며칠 뒤, 나는 몇 달 전 목장에서 일어났던 파업 이야기를 반조에게 들려주었다. 사무엘의 죽음, 그가 남긴 쪽지, 그리고 도널드의 깊은 죄책감까지. 나는 기억 속 장면들을 천천히 풀어놓았다. 그는 조용히 들었다. 때로는 눈썹을 찌푸렸고, 때로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모닥불이 거의 꺼져갈 무렵 그는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지터를 연주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묘한 긴장이 흘렀다. 사라조차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잠시 후 반조가 고개를 들었다.
“Bob, 떠돌이의 이야기를 시로 적어봤습니다.”
그는 첫 구절을 낮게 읊조렸다.
Oh, there once was a swagman camped by a billabong…
불빛 사이로 스친 그의 눈빛은 단순한 시인의 열정이 아니었다.
그건 크리스티나를 향한 미묘한 떨림 같았다. 그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반조는 다시 한 줄을 적었다.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my darling?
나는 ‘my darling’이라는 단어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약혼녀 사라를 향한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빠인 나는, 그 미세한 균열을 또렷이 감지했다.


4. 세 사람, 그리고 하나의 노래
며칠 뒤 그들은 Oondooroo Station으로 옮겨갔다.
크리스티나는 피아노 위에서 멜로디를 정리했고, 반조는 그 위에 시를 다듬었다. 그렇게 노래는 완성되었다. Waltzing Matilda.
그 곡은 한 떠돌이의 비극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자유와 고독, 사랑의 잔향이 뒤섞인 이야기였다. 그 안에는 반조의 방황도, 사라의 상처도, 크리스티나의 숨죽인 마음도 스며 있었다.
1895년 4월 6일, North Gregory Hotel에서 열린 주지사 만찬 자리에서 그 노래가 처음 연주되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곡이 끝나자 긴 침묵이 흘렀다. 반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빛에는 기쁨보다, 어딘가 부서진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5. 그 후의 이야기
사라는 시드니로 돌아가 약혼을 파기했다.
도널드는 그해 말 총을 들고 외딴 언덕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음악을 멈추었다. 더 이상 지터를 켜지 않았고, 집 밖으로 나가는 일도 드물어졌다.
반조는 떠났다. 남아프리카 전쟁터로 향해 종군기자가 되었고 세계를 떠돌았다. 그 후 이 땅을 다시 찾는 일은 없었다.
나는 때때로 Combo Waterhole로 나가 물결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면 수면이 흔들리고, 그 틈에서 누군가의 낮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그 노래 속엔 아직도 그 여름 세 사람의 그림자가 남아 있다.
시인의 방황, 여인의 상처, 그리고 남은 자의 죄책감.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도널드의 얼굴을 떠올린다.
불안하던 눈빛,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Bob 형, 나도 마틸다 메고 여행이나 떠날까.”


6. 에필로그 ― 마틸다를 메고
세월이 흘렀다.
Winton의 황야엔 여전히 붉은 바람이 분다. 사라는 런던에서 홀로 쓸쓸히 생을 마쳤고, 크리스티나는 세상과 단절한 채 결혼도 하지 않고 늙어갔다. 반조는 8년 뒤 가정을 이루었으나 한 여자의 품에 머물지 못하고 전쟁터와 대륙을 떠돌았다.
그날 이후 세 사람은 이 노래에 대해 단 한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인연은 흩어졌지만, 그 여름의 노래만은 남았다.
Waltzing Matilda.
그 한 줄의 my darling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서로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슬프게 지켜보았다.
지금도 밤이 되면 쿨라바 나무 그늘 아래서
나는 낮게 중얼거린다.
Who’ll come a-waltzing Matilda with me.



외로움/ 김동관

산책을 나섰다.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든 오렌지 타운 거리를 걷는데 내 발길이 닿은 곳은 낡은 4층 건물 두동이 있는 허름한 유닛이었다. 이곳 4층에 38년 전 내가 은행융자 95프로 대출로 사서 1년 반 동안 살았던 '호주의 고향 집'같은 방 두 개짜리 집이 있다.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겠지 생각하며 잠시 망설였지만 난 어느덧 계단을 올라 4층 22번 집 문 앞에 섰다. 사실 10년 전에도 오렌지를 지나는 길에 이 집 앞까지 왔었지만 집에 아무도 없어 들어가 보지는 못했었다. 집 안에 누가 있는지 노크를 해 볼까 망설이던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젊은 청년이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각오를 하고 말했다.


“실례지만… 38년 전 이 집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혹시, 잠깐 안을 들여다봐도 될까요?”


청년은 잠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약속이 있어 오래는 못 있지만 잠깐이라면 괜찮다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 순간,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스물다섯 청년이었던 나는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어 돌아왔고, 집은 여전히 그 자리, 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손수 페인트칠했었던 부엌 찬장과 낡은 코일 스토브만 바뀌었을 뿐, 집 안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맨 꼭대기 층 가장 끝에 위치한 집이라 내가 사용했던 작은 방은 큰 창문을 통해 집 앞 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이 방 문을 열어 보니 갑자기 가슴에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오늘처럼 단풍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던 38년 전 어느 가을날, 누구를 그리워할 사람도 날 그리워해 줄 누구도 없던 그때, 책상에 앉아 물끄러미 창문 밖을 바라보았었다. 도로 앞 나무에선 나뭇잎들이 후드득 바람에 떨어지고 도롯가엔 떨어진 단풍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 문득 아무도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세상에 유령처럼 혼자 있는 것 같은 공허감과 외로움이 들이닥쳐 며칠 동안 우울감에 힘들었던 기억 때문이었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외로움을 느껴보았던 기억이 몇 번 있다. 지방에서 살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로 올라와 대학 기숙사 방에서 지냈을 때 처음으로 외로움을 느꼈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호주 땅에 와 이곳 오렌지 타운에서 혼자 살아가던 그 가을날 참 외로웠었다. 그 후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다시 아미다일 타운으로 이주해 기숙사에서 지낼 때 또 한 번 비슷한 외로움을 경험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여전히 새로운 일터를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홀로 밥을 먹고, 홀로 걷고, 홀로 자지만 전혀 외롭지 않다.


왜일까?

어쩌면 나는 이제, 혼자라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물론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이제는 다가올 노후를 준비해야 할 시기다. 건강을 잘 유지해 가능한 한 끝까지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늙어서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외로움에 빠지지 않도록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이번 가을부터는 매일 30분씩 맨손체조와 근력운동을 습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또한 가족들과, 오래된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욱 진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애쓰고 있다.


이번 겨울, 두 달 정도 타지에서 혼자 지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순간, 눈물 나도록 감사한 마음이 차올랐다. 타지에 혼자 있을 때,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고 일상을 챙겨주는 아내의 관심과 사랑이 얼마나 고맙던지. 집에 돌아오면 달려와 내 품에 안겨 뽀뽀세례를 퍼붓는 작은 존재들이 내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이들이 있기에 외로움이 틈타 들어올 자리는 없다.


38년 전 오렌지 가을의 기억은 오늘의 내 삶을 더 깊은 감사로 채워준다. “네가 있어 내가 외롭지 않고, 네 존재가 있어 내 존재의 이유가 되니, 내가 널 더 사랑함이 옳지 않겠나.”




고통/ 김동관

오늘도 어머니는 고통 속에서 하루를 살아내셨다.


파킨슨 증후군을 앓고 있어 이제는 스스로 몸을 옆으로 돌려 눕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일도 할 수 없다. 작은 물병 하나 들어 올려 가져다 마시는 일조차 어머니에겐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무엇인가 말을 하시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고, 얼굴을 찡그린 채 웅얼거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을 향한 마지막 하소연처럼 들린다.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 여덟 명의 자식을 낳고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어머니의 삶을 더 고통스럽게 했고, 아버지 또한 평생 그 원망을 들으며 힘겨운 삶을 살다 가셨다. 결국 어머니는 여든 하나에 파킨슨 증후군을 얻어 여든아홉이 된 오늘까지도 그 원망을 내려놓지 못한 채, 육체의 고통과 함께 힘겨운 생을 이어가고 있다.


고통.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붓다)는 인생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말했다.
생로병사 -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어야 하는 고통,

애별리고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원증회고 - 싫어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고통,

구부득고 - 원하는 것을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그리고 오온성고 - 보고(색) 느끼고(수) 인식하고(상) 의도하고(행) 의식(식)하며 겪는 고통.

즉, 생로병사의 과정 속에서 끝없이 변하는 무상한 것들을 쫓고, 실체 없는 ‘나’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고통 속에 살고 있을까.
생과 사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그것이 내게 고통이 되지는 않는다. 죽음 이후의 세상을 믿지 않기에 두려움도 없고, 그로 인한 괴로움도 없다. 늙어가는 일은 오히려 깨달아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니 그것 또한 고통스럽지 않다. 다만 병들어 몸이 아플 때, 혹은 내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최소한의 독립된 생활조차 할 수 없을 때 찾아올 마음의 고통만은 두렵다.
그래서 나는 다짐한다.
죽는 날까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겠다고.


애별리고.
내 인생에서 이 고통만은 경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가족 중 가장 나이가 많으니,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의 고통은 내가 그들보다 먼저 떠남으로써 피하고 싶다.


원증회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원망할 사람도 없고, 나를 괴롭힐 만큼 미워할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그것이 고통이 되지는 않는다.


구부득고.
무언가를 꼭 얻어야겠다는 큰 욕망도,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거대한 야망도 이제는 없다. 그러니 얻지 못함으로 인한 괴로움도 나에게는 없다.


오온성고.
보고 느끼고 인식하고 의도하고 의식하는 다섯 가지 속성이 시간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불현듯 일어나는 욕망과 분노도 곧 지나갈 것임을 알기에, 고통이 내 마음을 오래 붙잡지는 못한다.


어머니의 고통은 결국 집착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아버지에게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원망에 붙들려 원망이 일상이 되었고, 마음의 병이 오래되어 육신의 병까지 불러와 삶 전체를 고통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에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어머니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아들인 나는, 머리로는 어머니의 고통도 머지않아 끝날 무상한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의 심장에서 전해오는 찌릿찌릿한 고통을 겪고 있다.




자가출판 성공스토리/ 김동관


내 인생의 첫 책이 출판되었다.


사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내가 책을 쓰면 좋겠다고 했다. 호주에 온 지 38년이 되었고 특히 지난 14년간은 호주 전 지역을 다니면서 일하느라 호주 일주도 네 번을 했고 북한 여행을 포함해 세계 25개국을 여행했다. 그래서 여행 책을 써보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인터넷에 여행정보가 넘쳐나는데 굳이 나까지 여행책을 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어 망설였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름으로 출간된 책을 한 권은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서 지난 이십 년간 퀸스랜드 문학회에 참석하면서 발표했던 글들과 브리즈번과 멜번의 주간지에 기고했던 글 등을 정리해 책으로 만들기로 계획했다.


일단 책을 만들어 보겠다고 계획은 세웠지만 책을 어떻게 출판하는지 경험이 없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었다. 내 환갑 때는 꼭 책을 출판해 환갑 기념을 해야겠단 마음도 먹었지만 그것도 못하고 또 2년이 지났고 결국 2025년 62번째 내 생일을 맞아 우여곡절 끝에 편집을 마치고 출판사로부터 출판 승인을 받아 내 인생 첫 책을 받아보게 되었다. 전문 출판업자가 보기엔 많이 어설퍼 보이고 오타도 종종 보이겠지만 내가 혼자서 편집하고 교정 보아서 만든 것이었기에 이 정도의 책이 나온 것만으로도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347페이지 칼라 프린트 책자는 내가 백 프로 쓰고 디자인해서 출판사에 넘긴 것인데 어떤 출판 디자이너의 도움도 없이 무료 출판사인 부크크(Bookk.co.kr) 플랫폼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나는 6년 전 우연히 페이스북 글을 읽다가 브런치(brunch.co.kr)란 작가 플랫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 글 3편을 보내 작가 신청을 했는데 단번에 승인을 받아 2019년부터 브런치에 글을 공유하고 있다. 브런치는 5만여 명의 작가들이 가입된 한국 최다 블로그인데 가입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작가 신청을 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 브런치작가가 되면 개인 사이트에 본인 글들을 올리면서 주제별로 매거진도 만들고 브런치북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매거진에 글이 30개 이상이 되면 자가출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가 지원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자가출판 플랫폼인 POD(Publish On Demand) 서비스를 이용해 그동안 계획했던 내 인생 첫 책 출판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자가출판 플랫폼은 PC컴퓨터로만 이용할 수 있어 내 개인 컴퓨터가 없는 나는 학업을 위해 구입한 아내의 컴퓨터를 이용하여 본격적으로 편집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내가 출판하기 원하는 글들을 책에 인쇄될 순서대로 배열해 브런치 매거진에 다 옮기고 사진과 함께 글을 최대한 잘 디자인해서 매거진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POD 출판 신청을 위해 매거진 글을 우선 내 컴퓨터에 다운로드하기를 신청하였다(2026년부터 다운로드 서비스 중단). 내가 쓴 시와 수필들을 선별해서 넣고 호주 일주 여행기와 2019년에 다녀온 북한 여행기를 포함해 아내의 글 몇 편과 어머니의 인생스토리도 함께 넣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번역하고 코멘트까지 첨가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글 일부도 포함시켰다. 내 컴퓨터에 다운로드한 글을 책으로 인쇄될 때 보기 좋도록 글 간격을 조정하고 목차도 만들고 서문도 쓰고 내지는 만들었는데 책표지는 직접 만들 수가 없어 부크크에서 제공하는 무료 표지중 하나를 선택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책 제목인 ‘호주에서 노마드로 살아가기’의 이미지에 맞는 심플한 표지가 있어 채택했는데 의외로 표지가 깔끔하게 나와 맘에 들었다.


사실 중간에 편집이 잘못되었다고 몇 번을 빠꾸 당했지만 결국은 최종 승인이 나오고 ISBN(국제표준도서번호)까지 부여받게 되어 BOOKK 서점에서 뿐만 아니라 교보문고, 예스 24, 알라딘 등의 출판사에 입고가 되어 책자를 주문할 수가 있게 되었다. 책 가격은 조금 두꺼운 칼라판이라 32,500원으로 책정되었고 작가에게 지급되는 인세는 15프로로 계약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책을 낼 수 있는 POD 출판은 책 가격이 비교적 비싼 편이긴 하지만 언제든 책을 주문하면 바로 인쇄하여 배송해 줌으로써 책을 못 팔고 남는 재고의 부담이 없고 책이 절판되어 살 수 없는 경우도 없다. 작가가 출판 중지를 요청하지 않는 한 5개 이상의 출판사를 통해 책은 계속 판매된다.


출판사에 내 책이 입고되자마자 난 지인들에게 출판 소식을 전했고 호주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20여 권을 주문받아 곧바로 구매해 배송받은 내 첫 책의 실물을 보니 내가 출간 작가가 되었음이 실감 났다.


이렇게 내 인생 첫 책의 자가출판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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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jero와 함께 달린 50만 킬로/ 김동관


지난 15년간 이 차와 함께 호주 방방곡곡을 누볐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50만 킬로미터, 지구를 12바퀴 반을 돌 수 있는 거리를 이 차와 함께 달렸다.


50만이라는 숫자는 단지 주행거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가 이 땅에서 살아온 시간, 내가 건너온 계절들, 내가 지나온 사람들과의 인연, 그리고 나 자신이 걸어온 길이 모두 담겨 있다.


누군가에겐 그냥 오래된 차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이 파제로는 든든한 길잡이였고, 나만의 쉼터였고, 정든 오랜 친구였다.


이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숫자를 향해 나아간다. 100만 킬로미터. 또다시 지구를 12바퀴 반을 더 도는 여정.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 차와 함께 달리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Life continues until it sto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