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는 결말에 만약이 덧붙여지는 늦저녁.
이젠 어리다는 말을 덧붙일 수도 없는 처지이건만, 세상 참 좋아졌다던 어른들의 저주가 귓가에 선명히 맴돌고 있었다. 황급히 좋았던 것들과 좋았을 것들을 헤아려봤는데, 재고는 부족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들은 모두 유통기한이 지나있었지.
언제까지나 목적이 될 수 없을
정류장에서 두 발짝 떨어진 지점.
긴긴 요란함 끝에 새로이 지어졌지만 오늘까지도, ‘임대 문의’를 받고 있는 콘크리트가 빚어낸 그늘에 머물러 버스를 기다리는 오후. 참 좋아졌다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귓가에는 어렸을 적에 들었던 어른들의 저주가 맴도는 중이었고, 목적이 될 수 없는 정류장이 간직한 울적함의 모양을 이젠 알 것도 같았지.
더 이상 어리다는 말을 덧붙일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쯤은 분명한데, 나의 형태를 가늠하면 할수록 내게 붙여진 나잇값이란 게 난해하게 여겨진다. 시간에 길들여지는 만큼 딱 그만큼씩, 마냥 애새끼만 같았던 나 또한 언젠가는 어른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아무런 근거도 생겨나지 않을 짐작일 뿐이었다.
어른 혹은 애 같은 건, 고작 시간의 양 따위로 나눠지거나 정해지는 게 아니었지. 살다 보면 애새끼 같은 나보다 더욱 애 같은 어른이 많았고, 나의 어제들이 부끄러워질 만큼 의젓한 아이가 있었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을 이제는 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어서 이렇게 하나하나씩 이해할 수 있는 게 늘어간다면 언젠가는: 저 세상의 어른들이 일컫는 것처럼 좋아 보일 거라는 짐작도 했었다.
물론 이 짐작의 결말도 똑같았다.
세상을 채워내는 것들 중에 좋아졌다는 것들의 대부분은 알맹이가 빠져있었고, 알맹이를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구시대의 흔적으로 불리고 있었지. 이쯤에서 마음 울적해지는 사실은 나란 놈은 이도저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런 걸까, 내 귓가에는 여전히 저주가 맴돌았다.
세상 참 좋아졌다던 어른들의
저주가 귓가에서 선명히 맴돌았다.
긴긴 요란함 끝에 새로이 지어졌지만 오늘까지도, ‘임대 문의’를 받고 있는 콘크리트가 빚어낸 그늘에 머물러 버스를 기다리는 오후. 참 좋아졌다는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을 정류장의 울적함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 고갤 숙였다.
그나저나
잠시 후면 도착할 거라던 버스는
언제 오는 걸까.
안녕安寧의 의미를 얼마만치 곱씹어도 단물이 나오진 않았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씹으면 씹을수록, 질겅거리는 질감 그 위로 텁텁하고도 씁쓸하기만 한 맛이 배어 나왔지. 까만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을 맞이할 즈음에는, 가볍게 주고받는 인사말로는 부적절하단 의심이 이만큼씩 자라나있었다.
애당초 아무런 탈도 없이 편안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면 얼마나 있겠냐고, 거슬러 역행하는 생각 따위로 덧칠돼버릴 나의 오늘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심이 맺은 상품성을 갖추지 못한 열매였다. 그럼 그렇지. 나 이러해서 도무지 팔리질 않는 삶이었다고, 뻑적지근한 모가지를 끄덕거리면서 납득하려 했는데_
사람의 삶이란 거래될 수 없고,
거래를 해서도 안 된다는 낡은 법이 떠올라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서 주변을 둘러보면 진열된 상품밖에 없었다. 예술의 효용과 의미를 운운하던 어떤 날의 너는 번듯한 월급쟁이가 됐고, 하루의 효용과 의미를 숫자로 번역하는 일에 능해졌지.
글자밖에 모르는 나란 놈은 너를 보며 울적했지만, 그게 당연한 수순이었단 사실쯤은 잘 알아서 방금처럼 피식 웃어버렸다. 아무튼 간에 너는 너 나름대로 안녕한 걸까. 얼마만치 곱씹어도 단물이 나오질 않는 안녕을 많이도 씹어댔는데, 직접 물을 수 없는 물음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질겅거리는 질감 그 위로 텁텁하고 씁쓸한 맛만 배어 나올 뿐이었지.
아무래도 가볍게 주고받을 인사말로는
부적절하단 의심만이 무럭무럭 자랐다.
긴긴 요란함 끝에 새로이 지어졌지만 오늘까지도, ‘임대 문의’를 받고 있는 콘크리트가 빚어낸 그늘이 어제보다 어두워진 듯했다. 그러고 보면 늘 그랬다. 세상에는 사람과 사물을 가리지 않고 기다리는 것들이 많았다. 기껏해야 수단일 수밖에 없는 정류장은 사람과 버스를 기다렸고, 시간에 떠밀리듯이 오는 버스조차 신호를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콘크리트 또한 그런 것들 중 하나였지.
이어서 세상을 바라보다 적어내는 나도, 곳곳에 만연한 기다림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따가웠다. 그러니까, 도무지 안녕할 수 없는 나날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흔하기만 한 ‘기다림’은, 겪을 수 있는 온갖 불편함을 다 그러모아야 설명할 수 있는 지독한 무엇이더라고. 제아무리 안녕을 곱씹어봤자 단물이 나오지 않는 원흉이었지. 까만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을 맞이할 즈음에는, 가볍게 주고받는 인사말로는 부적절하단 의심이 몇 움큼씩 자라나있었다.
애당초 아무런 탈도 없이 편안한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면 얼마나 있겠냐고, 거슬러 역행하는 생각 따위로 덧칠돼버릴 나의 내일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의심이 맺은 상품성을 갖추지 못한 열매였다.
연신 텁텁한 이야기만 하는 뉴스를 힐끔힐끔, 흘겨보며 까만색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가 채널을 돌렸다. 매진이 임박했다는 홈쇼핑의 요란은 건너뛰고, 연예인의 일상을 훔쳐보는 관음증만 같은 예능도 건너뛰고, 이야기보다 감정만 도드라지는 드라마까지 건너뛰고 나니 볼 게 없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서 리모컨의 버튼 하나를 연타했다.
마치 주마등이라도 보는 듯이
휙휙 바뀌는 화면이 퍽 어지러워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남아있는 삶의 이유가 부재중인 노인이라도 된 듯이,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리다가 하루 종일 영화만 틀어주는 채널에 멈췄다. 내 기억에 “쓰레기 같은 영화”로 남아있는 영화가 나오는 중이다. 열 명의 사람들 중에 한 명도 웃기지 못할 코미디로 시작해서, 개연성이라고는 엿 바꿔 먹은 듯한 감정으로 갈무리해버리는 결말이 인상적이었지.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는 ‘천만 관객의 신화’를 일으킨 한국 영화라는데_ 그 시절을 되짚어보면 보기 좋게 속았다는 기분만 들지. 그저 화면을 물끄러미 보는 것만으로도 사뭇 불쾌해져서, 또 내쉬려던 한숨을 삼키고 리모컨의 버튼 하나를 연타했다.
주마등만 같은 채널의
끝나질 않을 것만 같던 회전
그 종착지는 스포츠채널.
10년도 더 지났을 어떤 날의 축구경기가 나오고 있다. 이제는 동네에서 볼 법한 아저씨가 됐거나, 한 팀을 책임지는 감독이 된 선수들이 잔디 위를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거기엔 어렸을 적 내가 좋아했던 장발의 공격수도 뛰고 있고, 나는 이 경기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후반전에 주어진 추가시간에 두 골이나 내어주며 내가 응원해 온 팀이 진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를 보여주며 줄무늬 유니폼이 더러워지도록 뛰었지만, 선수들의 ‘급’이란 게 상대팀에 비해 시원찮았던 우리 팀이 진다.
내가 좋아했던 장발의 공격수는 고개를 숙이고,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였을 주장은 동료들을 다독여주겠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온다. 동점골을 내어주고 역전골까지 내어주자 고갤 숙이는 선수들, 머릴 쥐어뜯듯이 감싸 쥐며 주저앉는 감독의 탄식까지 모두 아는 장면이다.
아까 삼켰던 한숨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만일 저 경기를 이겼더라면, 내가 응원하는 팀의 선수들은 조금 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까. 내가 좋아했던 장발의 공격수는 이 팀을 떠나지 않았을까. 이미 다 알고 있는 일들에 몇몇의 만약이 덧붙여지는 늦저녁.
기어코 올라오고야 마는 한숨을 결국
두 번에 나누어 내쉬고서,
까만색 리모컨 꼭대기에 자리한 전원 버튼을 눌렀다.
*탈삽(脫澁):
감의 떫은맛이 빠짐. 또는 떫은맛을 우려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