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 다음 밖에 나가보면 땅 속에서 올라와 있는 지렁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피부호흡을 하는 지렁이들이 숨 쉬기 위해 올라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길가까지 나왔던 지렁이들은 피부가 마르기 전까지 다시 땅 속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햇빛에 말라죽거나 사람들 발에 밟혀 죽고 만다.
언젠가부터 그런 지렁이들이 눈에 띌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서 흙으로 옮겨주고 있다. 햇빛에 타 죽는 게 왠지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아서.
지렁이에게 팔다리는 없지만 점점 굳어가는 몸을 느끼며 바짝 말라갈 때, 누군가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낱 미물일지라도 그 생은 치열할 테니 한 번쯤 날 구원해 줄 누군가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땅 속에서 사는 지렁이다. 나는 피부로 호흡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땅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때를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너무 멀리 나갔다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게 된다.
뜨거운 햇빛에 타 죽거나 거대한 발에 밟혀 죽거나.
그날도 나는 비가 와서 숨을 쉬려고 밖으로 나갔다. 멀리 가지 않으려고 아주 조금씩 움직였는데도 길을 잘못 들어 흙이 없는 딱딱한 바닥까지 기어 나오고 말았다. 날은 점점 개고 햇빛은 따가웠다. 내 촉촉했던 피부가 점점 말라가고 타들어가는 느낌으로 고통스러웠다. 서서히 굳어가는 몸이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혼자 맞이하는 죽음은 외롭고 쓸쓸했다.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있지도 않은 팔다리가 과거로 파묻혀 가는 순간을 아주 오랜 시간 견뎌야 했다. 내 몸은 이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목숨만 붙어있을 뿐. 이제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없겠지. 어서 머리끝까지 어둠이 덮여오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어디서 뜨겁지만 부드러운 물체가 나를 집어 들었다. 남은 힘을 짜내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더 빠른 죽음이 찾아온 것인가 했다. 부디 고통 없이 빠른 죽음을 맞이했으면 했다. 서서히 타들어가느니 이 편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찰나였지만 아주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기대했던바와는 다르게 내 몸은 다시 자유가 된 듯했다. 뜨겁게 내 몸을 짓누르던 물체도 배가 긁힐 것처럼 딱딱했던 바닥도 사라지고 흙내음이 온몸으로 들어왔다. 내 몸이 다시 시원해졌다.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벌써 죽은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날 도와 이곳으로 돌려보내준 것인가?
움직일 수 없던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다시 매끄러워진 몸으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바삐 움직였다. 내 몸에 닿는 흙의 감촉이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에 파묻혔던 시간이 다시 앞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모든 이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도 나를 살려줄 구원자가, 그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