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 창업 전 반드시 고민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
사실 식당 창업은 내게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 원래는 잡지사 근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외식 쪽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콘셉트 기획자, 컨설턴트로 지내길 바랬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프리랜서가 자유로운 영혼인 내게 정말 잘 맞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의 삶은 나의 20대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만족감. 어디서든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좋아하는 여행과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스스로를 책임지며 사는 삶은 나의 20대를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스스로를 책임지며 사는 삶은 나의 20대를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한 집안이다. 늦둥이인 나는 대학 4년을 학자금 대출로 다녔고 집안 사정은 부모님 두 분이 맞벌이를 해야 가정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의 경제 수준이었다. 손 벌릴 만한 집도 아니었고 딱히 손 벌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나는 일찍이 독립심이 키워졌다. 오히려 집의 도움 없이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던 중 뜻하지 않게 아빠가 다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장에서 현장 근로직을 하시는 아버님의 허리가 이제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빠가 다친 것도 걱정이었지만 아빠의 경제활동이 멈춰짐으로 인해서 가장의 책임이 내게 돌아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나의 계산대로라면 아빠의 정년은 5년 정도 여유가 있었는데.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그렇게 나는 5년 일찍 집안의 가장이라는 역할을 물려받게 됐다. 나의 두 번째 책임은 가족이었다.
20대 컨설턴트로 일하면 나는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일하는 곳에 쓴 것 같다. 열정이 불타올라서가 아니다. 정말 재밌고 원하는 일이었기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놀다 보니 자연스레 돈이 쌓였다. 직원 없이 혼자 일하니 고정비 걱정이 없었다. 그렇게 외식업 컨설턴트로 일하며 3년 간 모은 돈 1억. 자랑이지만 나는 20대 중반에 사실 1억이라는 돈을 모을 정도로 꽤나 잘 나가는 컨설턴트였다. 이것은 내 첫 장사의 종잣돈이 되었다. 당장 다음 달부터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나는 정기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사를 선택했다. 1억이라는 돈은 무척 커 보였지만 자본금 1억으로 보증금과 인테리어 투자금까지 하려니 생각보다 넉넉한 금액은 아니었다. 이토록 큰돈이 들어가는 게 외식업이었기에 신중에 또 신중을 더했다. 항상 경기장 밖에서 두는 컨설턴트 역할을 하다 실제 리그로 들어와 플레이어로 경험해보니 창업이라는 게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분야였다.
이토록 큰돈이 들어가는 게 외식업이었기에 신중에 또 신중을 더했다.
첫 장사의 아이템은 고깃집으로 선택했다. 인천 지역의 일반 주거 상권에 점포를 구했고 유행을 타지 않으며 근처에 획시을 할 수 있는 공단이 많았고 인근에 거주하는 고객분들께 꾸준히 소비될 수 있는 아이템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고깃집 콘셉트 개발 컨설팅 경험이 쌓여 있던 터라 기획형 고깃집을 만드는데 자신 있었다. 끝까지 집에서 부모님이 노는 꼴을 못 보겠는 나는 불효자였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매장에서 보다 편하게 일하실 수 있도록 매장 내 시스템을 짜는데 주력했다. 돌아보면 이때부터 시스템에 대한 눈이 트였던 것 같다. 두 분 모두 외식업은 초보시니까 주방에 대한 어려움과 부담감을 최소화하고 위험한 불 사용은 자제할 수 있도록 메뉴를 구성했다. 뚝배기 대신 테이블에서 끓여 먹는 전골식 메뉴를 도입했고, 엄마가 손쉽게 다룰 수 있도록 가정용 밥솥으로 밥을 즉석으로 지어줬다. 밥솥은 여러 대를 모아 하나의 퍼포먼스 공간까지 기획해 매장의 콘텐츠로 작용하도록 했다. 고기 작업은 매장에서 칼을 쓰지 않도록 공장을 컨택해 소분화 하여 납품할 수 있는 제품을 구성했다. 삼겹살의 경우 시기별 원육 편차를 피할 수 없었기에 삼겹살에 고객의 소비가 너무 편향되지 않도록 목살, 항정, 가브리 등을 포함해 우리 매장만의 특수부위 명칭을 덧붙여 여섯 가지 부위로 다양화했다. 이 모두가 철저하게 부모님이 편히 운영하실 수 있도록 고안해낸 나의 전략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여전히 다방이란 게 있는 동네인 C급 상권 월세 200만 원의 30평 매장 13개 테이블. 첫날 매출 70만 원. 저녁만 영업했음을 감안했을 때 꽤나 만족스러운 점수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는 마케팅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식당의 대표가 인플루언서니 가게 홍보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후미진 C급 상권에서 온라인 마케팅을 하는 곳은 아마 우리가 유일했으리라. 마케팅은 어느 상권에 가든 필수적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가게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미리 짜둔 전략들이 주효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용한 동네 장사 상권에 소 요란한 놈이 하나 들어온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근처의 삭당들과는 다르게 <육시리>의 톤이 크게 달랐다. 그렇게 일 매출 100만 원, 150만 원 그리고 200만 원까지. 첫 장사 성공의 성취감 취해 오픈 초기 몇 달을 행복하게 보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전화 한 통이 왔다. 본인을 인천 남동구 구월동 로데오거리에서 이자카야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인터넷에서 보고 <육시리>를 찾아 먹어봤고 브랜드를 꼭 구월동 로데오거리에 오픈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놀고 마셨던 휘황 찬란한 상권에 내 가게를 오픈한다고? 사실 사업적 생각보다는 번화한 동네에 <육시리>라는 브랜드를 꽂다는 명예욕에 더 앞섰던 것 같다. 친구들이 오며 가며 볼 것이고 그런 상황이 무척이나 뿌듯할 것만 같은 기분. 결과적으로 오픈한 2호점, 정확히 구월동 로데오점은 초 대박이 났다. 잘 짜인 매장이 압도적인 상권을 만나니 폭발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육시리>는 인지도를 쌓아 갔다. 흐름이 좋았다. 프리미엄 돼지고기 시장이 호황기였고 이후 별다른 마케팅이 없었음에도 창업 문의가 줄지었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오픈하다 보니 1년 만에 10호점 남짓 호점수가 늘어갔다. 모든 매장이 잘됐을까? 동네별 편차는 있었으나 생각보다 꾸준했다. 조금씩 고객분들이 알아주는 상황이 뿌듯했다. 본점은 비록 후미진 곳에 있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글로벌 프랜차이즈 대표였다.
그러던 중 머릿속에 물음표가 들기 시작했다. 매장 수는 늘어가는데 나에게 남는 게 무엇일까. 유명세에 혈안이 되어 무작정 오픈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내게 남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성공한 프랜차이즈 CEO라며 마치 큰 부자가 된 것 마냥 어느 자리에서나 나를 띄워줬지만 나의 주머니는 가벼웠다. 쉽게 말해 나에게 프랜차이즈는 밑지는 장사였다. 육시리라는 브랜드의 시장검증을 통한 객관화 없이 섣불리 오픈한 것이 화근이었다. 2호점은 큰 성공이었지만 사실상 육시리여서 잘된 거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지우지 못한다. 다른 좋은 브랜드가 들어왔어도 충분히 잘됐을 곳이다. 쉽게 말해 자리 빨. 우리는 준비되지 못한 본사였다. 본사를 운영하려면 수익이 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직원 뽑을 여력도 부족했다. 그러니 여전히 대표 혼자 뛰는 일당백의 회사였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일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어설펐던 모습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점주님들도 분명히 어수룩함이 보였을 텐데 믿고 창업해주신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브랜드의 시장검증을 통한 객관화 없이 섣불리 오픈한 것이 화근이었다.
프랜차이즈는 매장별 통일화된 매뉴얼과 상품의 퀄리티가 중요하다. 하지만 매장 수가 많아지니 지점별로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주님 각자의 사견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 지금 와서 서로의 잘잘못을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관리를 하지 못한 본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결단이 필요했다. 이렇게 끌고 가다가는 롱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프랜차이즈 산업은 상당하나 에너지 소모가 필요했다. 섣불리 덤벼도 되는 만만한 사업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씩 꼬인 실타래를 풀기 시작했다. 일단 수익형 가맹 본사를 만들기 위해 전략을 짰다. 장사로 치면 본사보다 훨씬 더 연차가 높은 가맹점주를 리딩 하기 위해 나는 배로 뛰어야 했다. 그동안 기획과 포장에 연연했다면 가맹점 유통 시스템과 매장 관리에 대해 더욱 집중했다. 당장의 개수에 연연하기보다는 양질의 가맹점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같은 브랜드이지만 지역별 고객의 반응과 매출이 차이 나는 것을 보면서 상권별 어떤 대응 전략을 갖춰야 하는지 탐구했다. (육시리 프랜차이즈 전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별도로 연재하려 한다.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이상하게 프랜차이즈는 파면 팔수록 끝이 없는 복잡한 로직의 산업이라고 느껴졌다. 20대 청년이 준비 없이 자신감만으로 덤볐던걸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외식업이라는 건 결국 늪에 빠진 것과 같다. 가만히 있으면 가라앉게 된다. 나에겐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가만히 있다 가라앉거나 힘들더라도 한 발자국씩 앞으로 전진하거나.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게 무거웠지만 책임감이 앞섰다. 그래도 브랜드를 믿고 따라와 준 점주님 그리고 <육시리>를 좋아해 주시는 고객 분들을 향한 감사한 마음이 앞섰다. 오직 스스로를 위해 일을 했던 20대 의 나는 프랜차이즈라는 산업에 발을 들이며 그렇게 타이는 책임지는 삶에 대하여 하나씩 배워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게 외식업을 하는 힘, 원동력을 묻는다면 나는 책임감이라고 답할 것이다. 톡톡 튀는 기획력과 전투력으로 무장했던 20대와 달리 30대로 접어드니 외식업은 엄청난 책임의 무게가 뒤따르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지만 결국 사람들과의 소통과 유대가 중요했다. 있는 나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과 섞일 수 있는 나의 모습을 찾아야 했다. 혼자만 앞서가는 속도보다는 다 같이 맞춰서 갈 수 있도록 호흡을 맞추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을 그대로 자동적 말하기보다는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자세가 필요했다. 프랜차이즈는 내가 뱉는 말 한마디에 일이 변화되고 그것이 돈으로 연결 지어진다. 결코 가볍고 싶어도 가벼울 수 없는 길을 걷는 것이다. 나를 넘어 우리의 브랜드로 팀원들 그리고 점주님과 가족분들, 직원분들과 또 그의 가족분들... 프랜차이즈란 어쩌면 브랜드 하나로 많은 이들의 생활이 유대되어 있는 생계 공동체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야 가늠할 수 없는 책임의 무게에 대해 이제야 비로소 피하려 하지 않고 겸허히 받아들이게 됐다. 외식 창업의 시작점 놓여 있는 당신에게 나는 과연 누군가를 책임지는 삶에 대해 준비가 되었는지 꼭 한번 되묻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