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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 mark Feb 14. 2021

잘 보려고 안경을 썼는데.

 하늘은 무척 파랗고 맑지만, 칼 같은 바람에 귀 언저리가 베일 것 같은, 봄이 하늘에서 차츰 내려와 겨울을 덮어가는 어느 주말 아침이었다.

 눈이 그렇게 좋지 않음에도, 나는 평소에는 밖에 나갈 때 안경을 잘 쓰지 않는다. 독일에 살면서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해야 할 일도 없거니와, 슬픈 사실이지만 어차피 저 멀리 쓰여있는 독일어가 보이나 마나, 반 까막눈인 건 다름없기에.


 하지만 이 날은 이제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되어버린 마스크뿐만 아니라, 안경까지 쓰고 집을 나섰다. 오늘도 내 입과 정신을 기쁘게 하고, 나아가 나의 완전한 주말을 시작하게 도와주실 '빵느님들'을 온전히 영접하기 위해서는 내 눈은 맑게 깨어있어야 했다.

 가는 곳은 동네에 있는 프랑스 빵집이었고, 대표 빵이라고 할 수 있는 마들렌, 뺑 오 쇼콜라는 평소와 같이 기본적으로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키쉬(Quiche)라는 조리빵이 먹어보고 싶었다.


 음, 일단 먼저 키쉬에 대한 나의 소감은 역시 조리빵은 한국에서 먹는 게 제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 있는 파리 바*트만 가도 그 수많은 종류의 피자빵들, 쫄깃한 찰떡빵위에 토핑을 올리고, 낙엽같이 생각 소시지빵 위에도 올리고, 바게트 위에, 속을 가른 핫도그 빵 위에도.  그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각의 매력에, 절대 같은 맛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뿐만 아니라 크로켓보다는 '고로케'로 불러야 제 맛인 그 빵 속에 있는 수많은 재료들. 카레, 야채볶음,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사랑 김치까지. 거의 똑같이 생긴 그 모습들 안에 각각 매력이 숨어있는.


 어쨌든 그 빵집의 빵들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맨 앞에 '1-3반' 피켓을 든 반장 뒤로 학생들이 주욱 일렬로 서있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니라, 1학년이라는 피켓 뒤로 한 무리가 서있는 것 같은 진열 방식이라서, 키쉬 뒤로 시금치-고기 키쉬, 베지테리언 키쉬, 베이컨-감자 키쉬 등이 나름의 규칙대로 놓여있었다.

 그런 키쉬들 사이에서도 나와 궁합이 잘 맞을 만한 친구를 찾아내야 하기에 내 눈은 잘 보여야만 했다. 그래서 일할 때 말고는 밖에서는 쓰지 않는 안경을 굳이 쓰고 나왔던 것이다.


 완벽한 준비 같았다. 내가 간과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는 것만 빼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날이 매우 추웠고, 현 상황으로 인해 마스크는 언제나 외출 시에 착용해야 한다는 것. 

 마스크와 코 사이로 빠져나오는 따뜻한 날숨은 추운 날씨에 안경 위에 살짝 얼어붙어 내 눈 앞은 점점 더 뿌예졌고, 결국에는 빵집에 들어서서는 연신 안경을 닦아내야 했다. 잘 보이려고 쓴 안경이 오히려 안 썼을 때보다 내 시야를 방해한 꼴이었다.


 안경을 다시 닦아내고 빵들을 골라내고 잘 사 왔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점점 뿌예지는 시야를 느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일이, 선택이 가끔은 상황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도 있구나. 아주 사소하지만 이 날의 안경이 그랬고, 예전에 가족끼리 언쟁이 있었을 때의 나의 태도가 그랬다.


 그 당시의 나는 한창 사람들의 심리를 공부했고, 대화를 주도하고 사람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산이었고, 자만이었다)

 우리 집은 다른 여느 가정만큼 화목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문제 하나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님과 형 사이에는 학창 시절부터 형성된 불신 등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갑자기 터져 나온 늦은 시간의 가족 간의 대화에서 내 나름대로 형을 변호한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이야기들이 형의 감정, 부모님 특히 어머니의 감정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서로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결국엔 모두의 감정이 터져버렸고, 처음으로 어머니가 형의 뺨에 손대시는 걸 보았다. 당연히 형도, 나도, 아버지도 놀랐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어머니 자신이었다.


 이 날 이후로 몇 일간은 가족 간에 어색한 공기는 흘렀지만, 다행히 점차 가족 간의 관계는 좋아졌다. 지금은 내가 떠난 한국에서 든든하게 맏이로서, 곁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무척 고맙게도 효자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다. (형에게는 항상 고맙고, 부담을 지우고 떠나온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하지만 가족 간에 감정적인 대화가 오가게 한 주체가 나였고, 지금에서야 옳지 못했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일이 벌어진 직후에까지만 해도 나는 이렇게 다 터놓고 이야기했던 일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이 날은 내게 후회되는 일이다. 어머니에게도 형에게도 상처를 주었던 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당연히 좋은 의도에서, 혹은 좋은 결과를 위해서 행동했던 일들이 상황, 환경에 따라서 도움이 되지 않는,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도 종종 발생한다. 다만, 모든 일에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으니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건 만들어 낼 수 있는 결과를 한 번 더 생각해보고, 과거에 내가 했던 일들에 비추어보고 행동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바보같이 오늘 아침에는 안경 벗는 걸 잊어버린 채 쓰고 나가서는 뿌예진 동네를 다시 걸어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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