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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한 Jan 31. 2024

여성 소셜에 대해서

여성을 여성으로 여기기에 생기는 모순점

  오늘은 써 보고 싶은 주제가 있어 진단 메이커를 돌리지 않았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도 한동안 뜨거운 감자였던, '여성 소셜'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옛날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여적여'에도, 일부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는 '여돕여'에도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남성들 간의 관계나 남성과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으면서, 사람들은 유독 여성 개인이나 여성들 간의 관계에 이분법적 판단을 적용하곤 한다. 성녀-창녀 이분법처럼, 여성들 간의 관계는 어쩐지 적 아니면 동료로 여겨지는듯 하다. '여성 소셜'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에게 떠오르는 두 가지 일화가 있었는데 재밌게도 두 일화는 '여성 소셜'의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측면에 부합하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여중에 다니고 있었는데, 친했던 친구와 다투면서 멀어지게 되었고 그 친구가 주류 무리에 속해 있었기에 교실에서 다른 친구를 사귀는게 힘들었다. 급식을 혼자 먹고, 체육 시간에는 늘 멍하니 강당 옆 계단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주류 무리는 소위 말하는 '일진'으로, 화장품을 숨기고 꾸미지 않은 아이들을 은근슬쩍 괴롭히거나 장난을 치며 선생님께 대드는 부류의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나를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기에 어떻게든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에게 투명 인간으로 지냈다.


  사건이 터진 것은 어느 여름날 체육 시간이었다. 신체 성장이 느렸던 나는 중학교 1학년 봄 즈음에 월경을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월경이 새는 것을 방지하는 속옷이 없었기에 일반 속옷에 중형 생리대를 착용하곤 했다. 평소엔 그런적이 없었는데 그 날따라 월경 양이 많았던 모양이다. 생리혈이 체육복까지 물들이고 있었는데도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운동장에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주류 무리의 여자아이 중 하나가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부채로 내 바지 뒤쪽을 가려주며 '너 생리 샜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당혹감과 부끄러움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데, 그 아이의 주도 하에 분주하게 주변 아이들이 생리대를 찾기 시작했고, 내 바지를 가려주었던 아이는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고 내가 화장실까지 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마 체육복이 한 벌밖에 없었으니 나는 치마로 옷을 갈아입었던 것 같고, 그 아이는 나를 보건실까지 데려다주었던 것 같다. 


  15년 전 일임에도 이 일이 강렬하게 머릿 속에 남은 것은 미디어에서나 본 것 같은 그린듯한 미담이 실체화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하철에서 갑작스럽게 쓰러진 누군가를 주변에서 힘을 합쳐 부축해줬다는 이야기처럼,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도와줘야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그 아이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가슴 속에 박혀있다.



  항상 이런 아름다운 일들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학교 3학년 때는 1년 내내 직·간접적인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했다. 당시 우리 반에는 학년에서도 유명한 일진 무리가 있었는데,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시시덕대며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특히 나이가 지긋하고 온화한 인상의 국어 선생님을 무시해 국어 시간마다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어느 날 참다 못한 선생님께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셨고, 나는 그에 맞춰 뒤에 앉은 무리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이 본인들 심기에 거슬렸는지 그 이후부터 그들은 폭언을 일삼았다. 벼룩 시장에 제출하기 위해 가져 온 옷을 뒤적거리며 '이딴 옷을 누가 입냐'고 깔깔거렸으며, 수학 여행에서 찍은 내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살이 쪘다고 비웃기도 했다. 일 년동안 나는 온갖 애를 쓰며 그들을 피해다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못 들은 척 했다. 내가 하는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검열하는 습관도 더 심해졌다. 친구들과 추억을 쌓으며 아름답게 마무리해야 할 1년은 나에게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1년이 되었다.



  사람들은 본인이 겪은 단편적인 일화로 여성 소셜을 일반화하려고 한다. 여성 소셜에 속하는게 어렵지 않았고 항상 주류였던 여성은 여성 소셜을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라고 여긴다. 반면 여성 소셜에 속하는 것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던 여성은 (속한 경험조차 없는 남성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그들은 여성 소셜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고 느낀다.) 여성 소셜을 불편하고 적대적인 공간이라고 여긴다. 나의 경우 여성 소셜의 이러한 이분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여성 소셜을 무언가 하나로 정의내리고 판단하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여성 개인의 연장선인 여성 소셜에 대한 차별이자 폄하다. '남적남'이나 '남돕남'이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 '남적여', '여적남', '남돕여', '여돕남'이라는 표현이 쓰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왜 항상 세상은 여성에 대해 꼬리표를 붙이고 싶어할까? 이것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람이 아닌 존재로 격하시키려는 시도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언제나 차별을 일삼아 왔고, 차별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꼬리표 붙히기(label)'였다. 현 시대 한국인들이 다른 민족에 대해 '짱깨', '쪽바리', '튀기'라는 멸칭을 사용하는 것처럼. 결국 '여적여'라는 말 자체가 여성 소셜을 차별하고 무시하고자 하는 강한 주관이 들어간 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여성은 인간이고, 여성 소셜은 인간들의 집단이기에 복잡할 수밖에 없다. 내가 겪은 서로 다른 두 일화처럼, 여성은 다른 여성을 돕기도 하고 해치기도 한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의를 갖고 누군가를 돕기도 하고, 악의를 갖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성과 여성 소셜에 대한 모든 논의는 애초에 여성이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바라보면 논리적인 오류 없이 해결된다. 자신이 어쩌다보니 집단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존재라면 집단에 위화감 없이 섞여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지만 집단의 성격과 다른 존재라면 겉돌게 된다. 나는 대부분 후자에 있던 존재이기에 여성소셜을 단 한 번도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여성 소셜은 그렇게 단순하게 적이나 동료의 형태를 띠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여성 소셜은 허상임을, 적-동료로만 나누어지는 사회는 없음을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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