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이한 Mar 13. 2024

고작 말 한 마디, 그렇지만

    나에게는 9살 연하의 늦둥이 동생이 있다. 초등학생인 여동생은 항상 막내 동생을 데리고 귀가했는데, 어느 날엔가 여동생 대신 막내 동생을 데리러 간 일이 있었다. 그래도 중학생이라고 초등학교에 들어서는게 민망했다. 쭈뼛쭈뼛 교실 문을 열고 동생을 찾았다. 동생의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서던 순간, 아이들 중 한 명이 한 말이 귀에 꽂혔다.

 "야, ㅇㅇ이 누나 흑인인가봐"

당시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었다. 친구들이 하얀 피부를 찬양할 때마다 옆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아이의 말 한 마디는 내 컴플렉스를 자극했다. 어마어마한 모욕감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하지만 고작 7살 난 아이의 말 한 마디로 상처 받았다는걸 누구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웠다. 결국 나는 이 상처를 마음 속에 꾹꾹 묻어두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은 평범하기 때문에 잔인하다. 평범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나에게 평생의 상처를 안겨 준 그 아이가 악의를 갖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 아이의 평범함에서 벗어난 존재였을뿐이다.


    자라면서 나는 평범함의 궤도에서 종종 이탈했다. 여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결혼 제도에 반대하기도, 젠더퀴어로 정체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의 시선과 당연하다는듯 툭툭 던지는 말은 나를 아프게 했다.

"나 원래 A 배우 되게 좋아했는데, 동성애자라는 이야기 듣고 싫어졌어"

"이한이 너는 남자친구 안 사귀니?"

"그래서 이한 쌤은 언제 애 낳을거예요? 애는 빨리 낳는게 좋아요"



    첫 발령을 받은 2019년. 내가 발령 받은 학교는 지역의 구 도심지로, 아주 오래된 동네에 있었다. 매년 받게 되는 명렬표에서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의 수가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양육자가 생계 활동으로 바쁘고 지치다보니 아이가 방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전자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양육자가 많아 코로나로 인해 원격 수업을 할 때도 꽤 애를 먹었다. 연락 없이 결석이 계속되거나 아동 학대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담임 교사가 가정 방문을 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교사와 학교는 누구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정통신문에는 '학부모'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행사나 단체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학부모 단체', '학부모 총회'라는 말을 당연하게 사용했다. 고민 없이, 관습적으로 그런 단어를 쓰는 것에 화가 났다. '부모님께 가정통신문을 전달해주세요'라고 말할 때마다 몇몇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 아이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끔따끔했다. '흑인'이라는 말을 듣고 움츠러들었던 중학생인 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말을 써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을 말인 '보호자'라는 호칭을.


    처음에는 '보호자'라는 말이 어색했다. 메시지나 가정통신문을 전달할 때는 '보호자'라는 단어를 썼지만, 전화로 상담할 때는 '보호자님'이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보호자라는 말을 쓰는 이유를 나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3월 초 교육 철학을 설명할 때 이에 대한 내용을 덧붙여서 설명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는 것처럼,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요. 우리 반에도 한부모가정, 두부모가정, 조손가정처럼 다양한 가족이 있어요. 나를 함께 사는 어른이 꼭 부모님이 아니라는거죠. 그래서 선생님은 올 한 해 동안 모든 가정을 존중하는 '보호자'라는 호칭을 사용할거예요."

보호자라는 호칭에 순간 갸우뚱하던 아이들도 내 설명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몇 년 동안 '부모님'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익숙하지 않지만, 함께 1년을 지내다보면 어느새 '이건 보호자님께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몇 나온다. 다른 것보다 아이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순간을 보지 않아도 되는게 기쁘다.


    고작 말 한 마디로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구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혼자 말 한 마디를 바꾼다고 아이들의 인생이 구원 받거나 거창하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의 조금은 세심한 말 한 마디로 평범함을 벗어난 한 아이의 마음을 잠깐이나마 감싸안아줄 수 있다면, 고작 말 한 마디지만 그것은 의미 있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