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차
2022년 6월의 마지막 날. 항상 꿈꿔오던 유럽여행을 하기 위해 도착한 인천공항. 사람이 꽤나 많았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해외여행 수요가 늘어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공항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고?. 2년 5개월 만에 출국. 오랜만에 온 인천공항에 이 많은 사람들을 보고 나니 실감이 났다. 이제 정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수화물을 맡기고 엄마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한 뒤 출국심사대로 들어와 출국심사를 받고 면세구역에 들어가니 코로나 시국 동안 리모델링을 해서인지 더 깔끔해 보인다.
라운지키 멤버십이 있는 나는 마티나 라운지에 들어가 와인과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굶주린 배를 채웠다. 왜 라운지에만 오면 배고프지 않아도 그렇게 잘 들어가고 잘 넘어가는지. 신라면 작은 컵까지 먹고 비행기를 탔다. 최근에 탄 비행기는 모두 제주도행이라 13시간 장기 비행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지만, 여행의 설렘이 걱정보다 더 컸기에 들뜬 마음으로 올라탄 비행기. 지금까지 우리나라 항공사만 이용하다가 외항사를 타니 느낌이 낯설다. 아, 난 폴란드 국적기인 LOT항공을 이용했다. 그래서 출입국시 모두 바르샤바를 경유하게 되었다.
13시간 후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흐린 날씨.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입국심사를 받았다. 경유 대기시간이 14시간이라서 바르샤바 시내 구경을 나가기로 했다. 짐 보관하는 곳에 내 무거운 배낭을 놓고 175번 버스를 타려는데 난생처음 보는 버스 티켓 구매 기계가 내 발목을 잡으리라 누가 예상했을까.
당황하는 나는 그 버스 티켓을 뽑다가 175번 버스를 두 번 놓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버스 정류장에 있던 폴란드인들은 날 바보처럼 봤을 것 같다. 버스 티켓도 못 사고 낑낑거리는 키 작은 동양인이 키 큰 서양인들 사이에 있었으니 말이다.
175번 버스를 타고 바르샤바 시내로 가는 도중 잘 터지던 유심이 갑자기 멈췄다. 데이터가 안 터지는 내 아이폰은 사진 촬영만 할 수 있는 아이폰이 되고만 것. 너무 당황하고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불안해 보이는 내 옆자리에 앉은 한 폴란드 남자가 나에게 무슨 일이냐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었고, 난 내 사정을 이야기한 뒤 그 폴란드 남자에게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안내를 받았다. 그 폴란드 남자가 없었더라면 한국인 여행객이 적은 바르샤바에서 난 분명 미아가 되었으리...
그 폴란드 남자는 나에게 관심을 많이 보였다. 어디에서 왔는지, 한국에서는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고 본인은 폴란드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으며,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이야기해주었는데 폴란드 억양의 영어가 전부 다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의 이름도 폴란드 억양이라서 기억을 하지 못한다.(미안해... 근데 나 피터 아니고 빅터야)
그 버스에는 엄청 이쁜 여자아이와 아이의 엄마와 할머니가 같이 탔다. 아기가 이뻐서 내가 자꾸 쳐다보며 웃으니 아이 엄마와 할머니가 웃으면서 인사를 해준다. 폴란드 인사가 생각이 안 나서 무척 아쉬웠다.
(촬영: 라이카 T + 18-56mm ASPH)
(촬영: 라이카 T + 55-135mm ASPH)
폴란드 남자가 알려준 대로 내렸다. 근데 이게 무슨 일이람. 내리자마자 내리는 비. 내 우산은 짐 보관소에 있는데... 여행 첫날부터 완전 멘탈이 망가진다. 다행히 비는 구슬구슬 내렸고, 난 어렵지 않게 바르샤바 구시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유럽 도시의 중심가. 여행의 설렘 때문이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고 멋있어 보였다. 멋진 건축물보다 폴란드 사람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것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꺼내 열심히 담았다. 먼 훗날 지금 느낀 이 감정을 사진들을 보며 기억할 수 있게.
(촬영: 라이카 T + 55-135mm ASPH)
해가 진 바르샤바는 예쁘다는 표현을 넘어 몽환적이었다. 어떤 색을 입혀도 다 어울릴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가진 도시. 노상 카페와 식당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폴란드 사람들을 보니 괜히 나도 웃음이 나고 행복해져 또 카메라에 그 장면들을 담았다. 어떤 이들은 물담배를 하는데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내가 괜히 피워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 연기를 보며 다음에 다시 오면 꼭 물담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175번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가는데 우연처럼 아까 시내로 올 때 같이 버스에 탔던 예쁜 여자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또 같이 버스를 탔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엄청 웃었다. 내 데이터는 여전히 터지지 않아 불안했지만, 그녀들을 보니 어찌나 행복한 웃음이 나던지. 나보다 먼저 내린 그녀들은 내리기 전에 내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해주었고 여자아이는 버스에 내려 창문 밖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손 흔드는 내 눈에선 아마 꿀이 떨어지고 있었겠지. 여행이란 의도치 않은 변수가 생겨도 사소한 일에 웃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 같다. 비록 오늘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갔고, 사진 찍어준 사람들과 인스타를 주고받지 못했지만, 난 행복해서 계속 웃었으니 성공적인 여행 첫날이라고 해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