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파티 데이트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든다."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146P
비가 올 듯 흐렸지만, 끝내 비는 내리지 않던 8월의 두 번째 토요일. 삼성동 파크하얏트 호텔에서 오전 촬영을 마친 뒤, 강남역에서 그녀와 첫 데이트 이후 2주 만에 다시 만났다.
나와 달리 그녀는 조금 낯을 가리는 듯 보였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2주라는 시간이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 건지. 첫 데이트 마지막 인사 때와는 어딘가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우리는 이태원 몬드리안 호텔로 향했다. 버스에 나란히 앉자, 향기로운 그녀의 향수가 코끝을 스쳤다. 서양인의 체취와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첫 데이트 때 맡았던 향과는 또 다른 향이었다.
버스에서 우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I wish you could come to Europe while I’m traveling on December, I think I’d be happier spending my first New Year abroad with someone I like rather than alone"
2026년 새해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한국이 아닌 곳에서 맞이하는 새해가 될 예정이다. 그런 순간에 혼자 있기보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연차를 많이 소진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금전적으로 유럽 여행을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함께 여행을 갈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늘 어떤 것들을 챙겨 왔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검은색 수영복을 맞춰 입기로 했기에, 그녀는 검은색 모노키니를, 나는 검은색 수영복 바지를 가져왔다. 나는 그녀를 위해 헤어드라이기와 빗도 챙겼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전날 쿠팡에서 주문한 탐폰도 챙겼다.
챙겨 온 탐폰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갑작스럽게 필요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까 해서, 쿠팡으로 주문했어. 가방에 넣어둬"
그녀는 탐폰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다 생각하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라도 부담스럽게 느낄까 봐 싶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의 반응은 괜찮았다. 계속 내 손을 잡고 있었고,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몬드리안 호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먼저 수영장에 들어가니, 미국인 친구 B와 아르헨티나인 친구 J가 있어서 반갑게 인사했다. 일주일 전 사진 촬영으로 알게 된 친구들인데, 이렇게 풀파티에서 다시 만나니 더 반가웠다. 친구들이 일찍 와서 선베드를 잡아둔 덕분에 나와 그녀도 선베드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한 달 전, 그녀를 처음 만난 공간. 이제는 그 공간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우면서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날은 여전히 흐렸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검은색 모노키니를 입은 그녀는 한 달 전 비키니를 입고 있었을 때처럼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고 섹시했다.
일주일 전, 풀파티에 가기로 한 뒤로 그녀는 계속 몬드리안 호텔의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베드를 잡자마자 바로 음식을 주문하러 갔다. 호텔이다 보니 일반 햄버거보다는 비쌌다. 그래도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다 사주고 싶었다.
햄버거는 보통의 수제버거보다는 조금 더 큰 사이즈였다. 입을 크게 벌리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햄버거를 예쁘게 잘라주려 했지만, 칼질이 이어질수록 재료들이 점점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녀는 사고 친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That's enough"
그래도 나의 마음을 알아준 그녀는 고맙다고 말하며 햄버거를 맛있게 먹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I'm happy"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햄버거를 다 먹은 우리는 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잠시 쉬었다가 물에 들어갔다. 그런데 물이 생각보다 너무 차가웠다. 분명 물 온도를 28도도 유지한다고 했는데, 체감은 15도 이하처럼 느껴졌다.
물속에서 수영을 하기보다는 사진을 더 많이 찍었다. 셀카를 찍기도 하고, 내가 그녀를 찍어주기도 했으며, 그녀도 내 모습을 아이폰으로 담아주었다. 몬드리안 호텔의 시그니처 스팟에서도 함께 사진을 남겼다. 다른 사람의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즐겁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후 5시. 그녀가 배우는 라틴 댄스 수업이 6시에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는 아쉽지만 수영장에서 나왔다. 그녀는 내가 챙겨 온 드라이기와 빗을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머리가 길다 보니 젖은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한 채 샤워실에서 나왔다. 호텔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녀는 날 안아주며 내 볼에 입을 맞췄고, 나는 곧장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에 맞췄다.
그녀의 댄스 학원으로 가는 택시 뒷자리에서 그녀는 내 쪽에 기대어 누웠다. 나는 팔로 그녀를 감싸 안고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오늘도 너무 즐거웠다며, 행복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택시가 그녀의 학원에 가까워질수록 더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서 속상했다.
택시에서 내려 그녀의 댄스 학원 옆 골목에서 굿바이 키스를 하고 우린 헤어졌다. 집에 가는데 그녀가 DM을 보냈다.
"I actually had my period today, so it’s good you brought that, I was so surprised and touched but I’m sorry sometimes it’s because of that that I don’t have so much energy and not good mood"
알고 보니 그녀가 오늘 조금 어색하게 대했던 이유는 생리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건넨 탐폰은 단순한 준비물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 배려의 행동이었다. 오히려 나는 생리하는 날에도 약속을 미루지 않고 나와 함께 풀파티에 가준 그녀가 고마웠다.
두 번째 데이트도 성공적이었다. 날씨와 그녀의 컨디션, 그리고 타이트한 시간은 좀 아쉬웠지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관계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분명 서로 더 아껴주는 관계로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