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조금 더 괜찮아 보이게 만들어주는 주문
"사실 난 동물이란 말이야!"
뚱딴지 같은 소리지만, 내 억울하고 지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나만의 마법의 주문이다.
아주 어릴 때 만들어서 30후반인 지금까지 잘 써먹고 있는 주문이다.
어쩌다가 이런 요상한 주문을 만들게 되었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그렇게 곰곰히 생각하다보면 내 기억은 8살 정도의 어린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있다.
나는 더러운 집에서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살고있다.굶주린 배를 동생과 함께 부여잡고 언제 울고 화내고 때릴지 모르는 이상한 엄마의 눈치를 보고있다.
이정도만 말해도 행복한 어린이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인다만, 그래도...그래도 그 삶을 남과 비교 하지 않았다면, 나의 기억 저편에서 살고있는 어린시절의 나는 웃고있는 아이일까?
그 시절, 결혼과 출산이라는 강을 막 건넌 젊은 시절의 엄마는 아이를 양육하기에는 정신적으로 너무 불안정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매일 온몸이 아프다며 누워있었다. 귀신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했다.
밖에서의 엄마는 사람들을 마주할때면 눈도 못마주치고 배시시 부끄럽게 웃기만 하는 숫기 없는 새댁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엄마의 창백한 가녀린몸과 순한 얼굴에 속고있는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집에서는 몰래 남의 인생을 평가하며 욕하고 거울속에 비친 자신과 비교하며 좌절했다.
엄마에게 혹처럼 딸려 버린 동생과 나도 그 비교대상에서 자유로울수는 없었다.
불행히도 나는 이런 엄마의 소중한 오물창고였다.
엄마의 옆에서 엄마의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과 인격을정신적 일체, 육체적 체벌 등 어떤 방식으로든 꾸역꾸역 함께 느끼고 삼키는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나는 그렇게 엄마 옆에 딱 붙어 엄마의 공포가득한 세상을 통해 나의 세상을 보고 배웠다.
확실히 남들을 보면 ‘비교적’ 내 인생은 불행해 보였다.
어린 나는 몇 달 동안 빨지 않은 옷과 속옷을 입고 있었다. 씻지도 않아 때국물이 줄줄 흐르고 꼼꼼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말도 잘 못하고 눈알만 굴리고 있는 기분나쁜 녀석이었다.
엄마의 집요한 훈련(?)을 통해 조그만한 엄마처럼 변한 나는 '사회성'이라는것을 배우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마이너스가 된 채 학교에 던져졌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나는 학교를 다니는 내내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쉰내 나는 행주같이 느껴졌던 어린 나의 시절이었지만,
마냥 생존 본능만으로 죽지 못해 산 건 아니다.
나는 이것저것 재료들을 하나 둘 모아서 서툰 솜씨로 나만의 작은 텐트를 만들었다. 아무리 이 고통의 파도속에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질때도 그 작은 텐트안에서는 희미하게 느낄수 있었다. 그래도, 고작 이런것일지라도, 이것이 내가 쥐고있는 '나의 삶'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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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그 텐트를 이루고 있던 주 재료들은 다음과 같았다.
1. 나는 사실 인간이 아니라 귀여운 동물이다.
2. 나보다 약하고 작은 동물 친구인 둘째 여동생이 있다.
(막둥이 셋째 여동생은 동물 친구로 인정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3. ‘신나는 엄마'일 때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애정을 기억한다.
4. 지금 내가 가지고 싶은것을 가진 나’를 상상하는 것에 몰두한다.
(아쉽게도 돈, 명예같은 멋진것들이 아니라 '치킨' '멋진집'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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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내가 만든 소중한 텐트는 어른이 된 지금의 텐트는 그 모양도 크기도 설치하는 방식도 달라졌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핵심 구성은 ‘1번’이다.
나는 사실, 못생기고 초라한 인간이 아니라, 그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동물’이라는 근사한 비밀이다.
(그 동물은 부엉이, 고양이로 상황에 따라 변한다)
그러니까, 내가 동물이니까, 내가 사랑하는 동생들도 동물. 그리고 연인도 동물인거고, 내가 싫어 하는 녀석들은 다 힘없고 귀여운 동물들을 괴롭히는 잔인한 인간인거다.
삶에 이리저리 치여 잔뜩 웅크린채 괴로워 하는 추악하게 생긴 인간인 나를 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근사하고 커다란 날개깃으로 사랑스러운 얼굴을 감추고 몸을 웅크려 '부엉. 부엉'하고 낮게 울며 슬퍼하는 '부엉이인 나'를 상상하며 이 슬픈 공기를 느낀다. 이렇게 나를 대상화해서 상상하노라면 훨씬 기분이 나아지는것을 느낀다.
하하 글을 쓰면서도 상당히 무안해진다. 누군가가 이 긁을 읽는다면 30대 후반의 중년을 바라보는 성인여자가 속으로 이런 상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것이 상당히 웃기거나 기분 나쁘지 않을까? 혹은 동물이 되기를 희망하는 다른 동지들도 있을까?
혹시 나의 이 은밀한 고백이 누군가의 오래된 상상과 맞닿아 있다면, 우리는 같은 종인지도 모르겠다.
부엉이의 날개로 이 고백을 쓰고 있는 야심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인간옷을 입고 인간인척하며 인간들이 일하는 일터로 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소중한 주문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것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야. 동물이야. 이 놈 들은 내가 인간인 줄 알고 있어. 바보같은 녀석들."
그렇게 나는 삶을 이어나간다. 부엉이로, 때때로 고양이로.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동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