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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부슬 Jul 27. 2021

그냥 읽고 싶은 거 읽을래

잠깐은 그래도 되잖아요

  다 읽지 못한 과학자의 에세이를 반납했다. 저자는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과학자였고, 복직과 동시에 수업에서 '면역'을 주제로 다루어야 하는 나에게 이 책은 일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연체 시 적용되는 페널티(대출 금지)를 받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이글거리는 태양열 및 복사열을 벗 삼아 도서관 외출을 감행했다. (체감상) 체온을 능가하는 기온이 달갑지는 않았다. 체온은 안의 온도인데, 나를 둘러싼 바깥이 안과 동일한 혹은 더 높은 온도를 같게 된 일은 매우 끔찍하다. 속이 뒤집힌 일이므로.


  반납일 엄수라는 목적만 있었다면 이 이야기는 한여름의 폭염 체험기 정도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읽고 싶었던 한 시인의 산문집, 내가 도서관에 구입을 요청했던, 바로 그 책을 빌리기 위한 속셈도 있었다. 과학자 에세이 반납이 표면적 이유라면, 시인의 산문집 대출은 비가시적 이유였다. 그렇다. 나는 겉모습은 과학교사이지만, 속사람은 시인이고 싶은 검은 욕망을 품고 있다.


  도서관 소독 시간이 임박해서 서가를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대출하려고 했던 책을 향해 곧장 직진한 후, 책을 뽑고 돌아서서 사서 선생님께 가져갔다. 책을 빌리고 도서관 출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책을 폈다. 직사광선이 책의 아이보리색 내지 위로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지난 며칠간 '수업 준비'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허덕이느라(코로나 데믹과 육아휴직 기간이 딱 겹쳐서 나는 온라인 수업 경험이 전혀 없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교실 풍경에서 잘 해내지 못할까 봐 나는 현재 불안지수가 매우 높다.) 수업과 연관된 텍스트가 아니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다. 변기에 앉아서도 과학자의 에세이를 읽었으니까. 그런데 계속 '읽어야만 하는' 혹은 '읽어야만 할 것 같은' 텍스트만 읽으면 명치가 답답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러니까 다이어터가 일주일간 매일 삼시 세 끼를 닭가슴살과 샐러드만 먹었을 때 마주하게 되는 물림의 순간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극단적인 식단 조절 후 폭식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시인의 문장을 읽었다.


  집에 돌아와 두 꼭지 읽고, 바로 수업 준비 모드로 돌입하긴 했지만 오늘의 읽기는 어제의 읽기보다는 어쩐지 속이 시원한 느낌이다. 폭염 속 외출 후 돌아와 마시는 얼음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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