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이야기
인간을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눈다면, 죽음은 분명 ‘산 자’의 문제일 뿐이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야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산 자’는 반드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해야 하기에, 죽음은 삶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죽음이 없다면 어쩌면 종교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할 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악이 실제의 죽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미리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라는 점이다.
지금 현재 내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공포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여기에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어떤 공포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살아있는 사람의 의식 속에 있는 죽음의 이미지에 의해서만 불러일으켜진다. 죽은 자에게는 공포도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것은 종종 이를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대처를 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령 내세에 영생(永生)을 누린다거나, 부활로 생(生)을 이어가는 등의 방식 말이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공포가 크면 클수록 죽음을 관리하는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갖게 되고, 이는 비교적 위험에 대한 통제가 가능한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의 공포에 집중하다 보니 나 자신만의 죽음에 생각이 쏠렸지만, 사실 우리를 견디기 힘들게 하고 한없는 슬픔으로 밀어 넣는 것은 나 자신 외에도 내 가족과 지인 등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이다.
“죽음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기나긴 꿈속으로 떠나가고 세상은 사라진다. 두려운 것은 죽어가는 고통이며, 또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의 상실감이다.”
생물학적 지식의 진보가, 삶을 연장하고 노화와 죽음의 과정이 주는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으나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면 죽음을 맞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또 중세와 현대를 비교하며 죽음을 둘러싸고 달라진 환경에 주목한다. 영양과 의학, 위생 등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 중세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죽음과 친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좁은 방의 한 옆에 임종을 앞둔 환자가 누워있고 이를 에워싼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중세의 회화가 이를 잘 나타낸다.
그러나 사실 이런 장면은 우리에게도 그리 먼 얘기가 아니다.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집이 많았고, 심지어 아파트 촌에서도 공터 한가운데에 천막을 치고 문상객을 맞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방이 몇 개 되지도 않다 보니, 죽음의 모습이 설사 부패하고 냄새나는 것일지라도 가릴 수가 없었고 오고 가는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레 죽음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치 중세 사회의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래 없는 일이다.”
우리도 언젠가부터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중병을 앓는 환자를 간호하는 것도 보기 힘들게 됐다. 현대의 조용하고 청결한 치료와 죽음의 처리 방식이 역설적으로 ‘산 자’와 ‘죽어가는 자’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은 최첨단의 과학적 의료 처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랑했고 그들이 옆에 있다는 것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게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은, 환자에 대한 합리적 치료와 병원 스태프들의 일상이라는 차원에서는 종종 불편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접촉은 가능한 최소화되고 금지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체와 장기(臟器)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고, 사람 자체에 대한 배려는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저자의 지적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병원의 깨끗한 시설과 최신의 약품 그리고 발전된 의료기술을 제공하는 것이,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최선의 존중이라고 생각하나 여기에는 불행히도 죽어가는 사람의 생각이 빠져있다.
만약 언젠가 당신이 노화를 이기지 못하고 요양원(요양병원)으로 옮겨진다면 그때는 어떤 생각이 들까?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은 오랜 감정적 유대가 최종적으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 개인이 어떤 긍정적, 정서적 관계도 맺은 적이 없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건강을 돌봐주는 의사와 간호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정상적인 삶으로부터 격리되고 낯선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에게는 외로운 일이다.”
외롭고 고독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은 이제 집이 아닌 병원이나 요양병원 등의 의료기관에서 삶을 마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집을 떠나는 순간에 이미 죽음의 초시계가 가동을 시작하는지 모른다. 죽음에 임박할수록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깊어지고, 이를 당혹스럽게 바라보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로는 의료진이 들어와 접근을 차단한다.
결국 현대인은 ‘산 자’나 ‘죽어가는 자’나 먼발치에서 외로운 작별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과정이 아름답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감각에 깊이 심어진 문명의 청결, 위생에 대한 강박은 더욱더 죽음을 회피하게 만들고 격리시키는 것이다.”
엘리아스는 죽음을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학적인 문제로 보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죽어가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위생적인 환경일까? 정서적 배려일까? 이제는 당신이 답을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