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지만) 2학년 때 '나머지 공부'라는 걸 해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머지 공부'라는 용어부터 수상하다. 수업 시간에 미처 끝내지 못한 남은 내용을 공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랬다고 한다면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남았을 텐데, 50명 학급에서 '나머지 공부' 대상이 된 아이들은 나를 포함해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필요한 학습목표를 달성한 아이들과 대비되는 의미로 10여 명에게 붙여진 용어가 '나머지'였으리라.
달성하지 못한 학습목표는 '구구단'이었다. 1단부터 9단까지 구구단을 외워야했는데, 학교 수업 이후에는 신나게 뛰어노는 일에만 골몰하던 어린이에게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특별히 추가로 시간을 내 구구단을 외울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 어쩌면 상당히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공부에 딱히 관심이 없던 시기였지만, 수업 시간 집중력 만큼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 남아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공부'는 정말 재미없었다. 그러니 지금까지도 그 흉악한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것일 테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놓은 구구단을 공책에 옮겨적었다. 다른 설명은 필요 없었다. 외우라는 거다. 그저 열심히 수 차례 옮겨적고, 다시 또 옮겨적는 행위를 되풀이했다. 교실 안은 10여 명 아이들이 중얼거리는 구구단 암송 소리가 주술처럼 맴돌았다. 그렇게 10여 분이 흐르고,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9단까지 다 외워야만 집에 갈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선언이었다. 아, 빨리 집에 가서 놀아야 하는데...
집중력은 딱히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집에 못 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은 머리 속을 마구잡이로 흐트러놓았다.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을 떠나자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대체 이걸 왜 외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구구단을 수십 번씩 공책에 옮겨적어야 했다. 반복에 반복을 더했지만, 구구단은 끝내 어린 목자를 구원하지 않았다. 다 외운 것 같은데도, 선생님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헷갈렸는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비슷한 처지에 놓인 한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고, 덕분에 모두가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억되는 '나머지 공부'는 그렇게 끝이 났다.
환브로도 어김없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구구단을 맞딱뜨려야 했다. 부전자전은 꼭 쓸 데 없는 곳에서 제대로 발현된다. 지환이도 구구단과 정말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둬놓고 암기를 시키지는 않더라는 점이다. 대신 가정통신문이 날아왔다. '구구단을 외울 수 있어야 다음 단계 수학에 어려움이 적다'라는 친절한 설명이 반가웠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 수업 시간만으로 모든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건 불가능했고, 그렇게 선생님들은 학부모에게 SOS를 보냈다.
맞다. 초등학교 수학을 또 그 이후 수학을 끌어가는 데 있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구구단이다. 인도에서는 19단을 익힌다고 하지만 그건 인도 사정일 테고, 구구단만 외우면 된다. 일부 사교육 시장에서 19단을 외우게 한다고도 하는데, 아이들 암산이 조금은 빨라진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계산기를 써도 되고, 조금 천천히 계산해도 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구구단을 외운다는 것조차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선행학습을 경멸하는 부모를 둔 지환에게는 특히나 어려웠을 테다.
지환에게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피아노를 즐기는 아이에게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못 치면 '쇼팽'을 칠 수 없다 정도의 간단한(?) 설명이 먹혀들었다. 알아 들은 건지 아닌지 모르게,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구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달리는 말에 채칙질을 살짝 해주기 위해, 예전 '나머지 공부' 이야기를 재구성해 들려주기도 했다. 열심히 반복해서 공책에 구구단을 썼더니 금세 외울 수 있게 됐다고, 그렇게 거짓부렁을 늘어놓았다.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고전적 가치를 듬뿍 담은 반복 더하기 반복 학습은 효과를 나타냈다. 2단, 3단, 4단 우습게 하나 둘 외워나가기 시작했다. 지환이가 혹시 수학 천재가 아닐까? 아니지, 수학 천재였다면 바로 다 외웠겠지. 그래 수학 영재 정도로 할까? 부모가 헛된 망상에 사로잡힐 쯤 현실적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6단부터 암기에 어려움을 겪은 아이는, 이미 다 외웠다고 한 3단, 4단도 헷갈린다. 순서대로 '사일은 사', '사이 팔' '사삼 십이'.... 잘 외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 곱하기 팔은 뭘까?'라고 물으면, 아이는 그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다행이었다. 환브로 학교에서는 구구단을 외우는 데 시간제한을 두지 않았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다고 집에 안 보내겠다는 시덥지 않은 협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학부모는 가정통신문을 구구단을 외울 때까지 등교를 시키지 말라는 당부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언제까지 외워야 한다는 제한은 따로 없었다. 덕분에 지환이는 천천히 자신의 속도에 맞춰 구구단을 외울 수 있었다. 반짝 효과를 보는 듯 했던 공책에 구구단을 옮겨적는 반복도 더이상 필요없었다.
매일 구구단을 못 외우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아이를 채근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큰일이 나지도 않으니까. 다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만큼은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중간중간 뜬금 없는 구구단 질문은 지환을 당황하게 했지만, 현실은 자극과 격려로 다가갔으리라. 누군가는 성적표 점수만을 기다리며 관심이라고 외치지만, 사실 평상시 아이에 대한 관심과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다르다. 결과에 대한 관심이 아닌 과정에 대한 관심 아닌가. 그렇게 다른 아이들이 순식간에 뚝딱 해치워버린 구구단에 우리는 한 달이 넘는 긴 시간을 투자했다.
중학생이 된 지환은 1차 방정식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른 아이들보다 구구단을 더 잘 외우는 것도 아니다. 사실 구구단이 외워봐야 거기서 거기지, 올림픽 종목도 아니고 차이가 나야 얼마나 나겠나. 거꾸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거기인 구구단을 왜 똑같이 같은 시간에 외워내야 했던 걸까. 아이들 개개인으로 보면 모두 한날한시에 태어난 건 아닐 텐데, 학사 일정이 반드시 원칙이고 기준이어야 했던 걸까. 다른 아이를 보면서 조급해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내 아이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건 어떨까. 문제는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나머지 공부' 자체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