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인대를 내어주고 행복을 챙겨 오다
지난 4월 9일, 저는 시간을 거슬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제가 중학교를 졸업한 지 대략 30년 만의 일입니다. (세월 참 빠르네요) 저를 다시 10대 시절로 소환한 곳은 첫째 지환이가 졸업하고, 둘째 려환이가 다니고 있는 춘천 가정중학교입니다. 이곳에서 열린 '상호존중행사' 덕분에 저는 기꺼이 일상의 무게는 잠시 내려두고 가벼운 동심만 챙겨 들고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 곳곳에는 여전히 첫째의 흔적이 다정하게 남아있었고, 둘째 려환이는 어느새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는 당당한 가정중학교 학생으로 자라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불렀지만, 진짜 재미는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교육청이 이름 짓고, 아이들이 판을 깐 놀이터
'상호존중행사'. 교육청에서 내려온 명칭만 보면, 근엄하고 딱딱한 행사 같지만, 실상은 딴판입니다. 학생, 교사, 보호자라는 '교육 3주체'가 한데 모여 격식 없이 어우러지는 유쾌한 친목 도모 마을 잔치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멋진 건, 이 행사의 기획과 준비를 학생자치회 아이들이 주도한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은 그저 거들뿐, 판을 까는 건 아이들이지요.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 행사인데, 작년의 흥행을 견인했던 '가정기네스'가 올해도 여지없이 대히트를 쳤습니다. 종목의 면면을 살펴보면 꽤 가관(?)입니다. 림보, 플랭크, 윗몸 말아 올리기 같은 체력장 종목부터 양궁, 농구 자유투, 종이비행기 오래 날리기가 등장하더니, 급기야 '콩알 옮기기', '자전거 느리게 타기', '동그라미 잘 그리기', '가위바위보'까지 튀어나옵니다.
기록요?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1등을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지요. 그저 함께 땀 흘리고 배꼽 빠지게 웃는 그 순간의 공기가 좋을 뿐입니다. 물론, 경이로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 발로 오래 서 있기'에 출전한 한 아이는 무려 30분을 넘기며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버틴 탓에 정작 다른 프로그램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는 '웃픈 전설'이 되어버렸죠.
저 역시 질 수 없어 '윗몸 말아 올리기'에 도전했습니다. 1분 제한이었지만, 30초 만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딱 30개만 채운 채 바닥에 누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보던 센스 만점 학생이 사진을 찍으라며 기록지에 '130개'라고 슬쩍 적어주는 게 아니겠습니까. 으하하. 이 녀석. 사회생활을 벌써 깨우쳤더군요.
사실 아이들이 이토록 기네스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8개 종목의 도장을 깨고 나면 보호자들이 준비한 '간식 타임'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체육관 한쪽에서 핫도그와 핫바가 치명적인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데, 어찌 도장 8개를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본주의, 아니 '간식주의'의 완벽한 승리라고나 할까요?
마음은 중학생인데, 다친 건 손가락 인대
기네스로 몸을 푼 뒤에는 학생, 교사, 보호자가 팀을 이뤄 본격적인 '명랑운동회'가 펼쳐졌습니다. 단합의 상징 '2인 3각'에서는 신기술이 난무했습니다. 다리를 묶긴 묶었는데, 마음 급한 한 친구가 짝꿍을 번쩍 안아 들고 달리는 기상천외한 광경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비극은 이어진 '꼬리잡기'에서 발생했습니다. 중학생 아이들의 날쌘 몸놀림과 에너지를 제가 너무 얕보았습니다. 멋모르고 전장에 뛰어들었다가 중심을 잃고 체육관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습니다. 아뿔싸. 왼손 엄지손가락 인대가 늘어났습니다. 행사 후기를 핑계 삼아 글을 남기고 싶었는데, 엄지가 시큰거려 며칠을 미루다 이제야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는 '절대' 게으름이 아닌 엄지 부상 때문일 겁니다.
한바탕 난리통이 지나간 후에는 대망의 경품 추첨이 이어졌습니다. 명품 백 부럽지 않은 거대한 상자들이 쌓여 있었는데, 아내가 한껏 기대를 품고 엄청나게 큰 포장 상자를 골라잡았습니다. 집으로 고이 모셔와 두근두근 포장을 뜯자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초코파이 한 상자'. 그래도 맛있으면 된 거겠지요. 저희는 초코파이를 품에 안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었습니다.
오후에는 급식실에서 아이들의 밥을 얻어먹으며 영양사 선생님과 조리사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전했고, 학부모들과 커피 한잔 하며 수다 꽃을 피웠습니다. 수업공개 시간, 교실에서 열공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 뒤, 학교생활 전반에 대한 교육까지 듣고 나니 어느덧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내 아이를 넘어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손가락은 욱신거리고 체력은 방전되었지만, 학교를 나서는 마음은 봄바람처럼 가벼웠습니다. 어릴 적 운동회는 온 마을의 축제였습니다.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총출동해 김밥을 나눠 먹고 흙먼지를 마시며 함께 달렸지요. 하지만 요즘은 많이 다릅니다. 초등학교는 그래도 아직 여유가 있지만, 중학교부터는 낭만이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입시'라는 거대한 굴레 속에 아이들을 밀어 넣기 바빠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입시가 코앞이든 아니든,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입니다. 노는 게 제일 좋고, 혼자 노는 것보다 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하는 평범한 10대들입니다. 흔히들 요즘 아이들의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하지만, 어쩌면 그건 '함께 놀아주지 않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만든 씁쓸한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행사가 그토록 벅차게 좋았던 이유도 그 결핍이 완벽하게 채워졌기 때문일 겁니다.
바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보호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괜찮았습니다. 그곳에 모인 어른들은 '내 아이'만 쫓아다니지 않았으니까요. 입학식 때 미리 사진을 보며 예습해 둔 덕분에, 저는 려환이와 같은 반 아이들 모두와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행사장에 오지 못한 보호자들을 위해 아이들이 땀 흘리고 웃는 예쁜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아 아낌없이 공유했습니다. 다른 보호자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남의 아이, 내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의 아이들과 신나게 호흡했습니다.
경쟁과 입시의 굴레에서 벗어나 늘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려 애쓰는 학교이기에, 오늘 하루는 어쩌다 한 번 주어지는 꿀맛 같은 휴식이라기보다, 늘 그래왔듯 다 함께 왁자지껄 어우러지는 유쾌한 일상의 풍경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다시 중학생이 되어 체육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마흔다섯 아저씨에게도, 이 봄날의 명랑운동회는 아주 짙고 다정한 여운으로 남을 것입니다. 아, 당분간 욱신거릴 엄지손가락은 영광의 훈장으로 남겠죠. 엄지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