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 요절하고 싶다_구안

: 몸과 마음을 앓는 두 여자의 생존 일지

by 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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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눈이 내렸다. 출근길은 야단이다. 아직 어둑한 거리. 눈인지 염화칼슘인지 흰 부스러기를 밟고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속초 살 땐 눈이 왔다 하면 무릎까지 쌓였는데 서울은 뭐든 금세다. 이십 년간 안 변한 건 내 우울뿐.


버스 맨 앞자리에 앉는다. 그래야 사고가 났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김 서린 창문에 이마를 댄다. 만약 눈길에 버스가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박고 반대편 차선으로 간다면 그래서 전복된다면 내가 남긴 이마 자국이 유서가 될 수도 있겠다. 틈만 나면 죽을 궁리다. 유리 너머 얼룩덜룩한 도로, 속도를 내도 겨우 10km다.

까무룩 졸다가 눈을 떴다. 느릿대던 버스는 아예 멈췄다. 코트 소매로 김 서린 창문을 닦고 바깥을 본다. 출근이 급한 건지 성미에 못 이긴 건지 몇몇이 갓길에 차를 버리고 도로선을 따라 걷는다.


자주색 패딩을 입은 이가 씩씩대며 버스 옆을 지나친다.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나아가지 못하는 차 때문일까. 왜 저리 매정한 표정을 짓는 걸까. 궁금하다. 저들은 언제 어떻게 차를 데리러 올까. 오긴 오나.


나와 동생을 각그랜저 뒷좌석에 태우고 한화프라자도 가고 영랑호리조트도 가던 내 부모는 폭설도 아닌 계절에 우릴 버렸다. 달리 표현하고 싶은데 버리다,라는 동사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혼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모두 우울증을 겪진 않는다. 우울증은 뇌 염증과 같은 질병으로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도파민이 부족한 상태를 말한다. 가정사가 아니어도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체내 수분량과 맞먹는 내 우울은 환경과 시너지에 의해 극대화되었다.


우울은 곧 가라앉는다고 표현된다. 아니다. 반대다. 뇌에서 비롯된 염증은 핏속을 돌아다닌다. 둥둥 떠다닌다.


그건 중력이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어라, 발이 닿지 않네 둥둥 뜨네. 떠 있어!
나는 발 닿은 이들을 보며 사는 내내 부레옥잠 상태가 된다.


딱 한 번 땅에 발이 닿은 적이 있다. 스물 세살이었나. 극장에서 영화 밀양을 보다가 중간에 나와 담배를 서너 개쯤 피웠고 자취방에 가 싸이월드에 리뷰를 쓴 다음 커터 칼을 집었다. 눈을 떴을 땐 응급실이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정신병원 폐쇄병동 베드에 누워있었다. 의사는 피로한 표정으로 손목을 40바늘 꿰맸다고 알려주었다.


처음 죽고자 한 건 16살. 횟집에서 12시간 일하고 받은 4만원 중 일부를 헐어 약국에서 게보린 아스피린 타이레놀을 몇 통 샀다. 배 부를때까지 먹었는데 죽지 않았다. 나는 가정교육이라고 부를 법한 것들을 소설 만화 영화에서 배웠다. 자살도 마찬가지여서 그 정도면 약물 과다 복용이면 손쉽게 죽을거라고 생각했다. 리스트컷 증후군(손목을 긋는 등 자해 행위를 반복하는 현상)도 마찬가지. 둘 다 실패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았다면 더 확실한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한다. 대학원에서 문학비평 수업은 들은 적이 있다. 조르디 디디위베르의 <반딧불에 잔존>을 읽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이 정말 좋다. 오래 사유한 이들의 불가해한 문장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미학과 철학으로 벼려진 문장으로 동맥을 긋고 흰 욕조에서 죽어가는 상상은 참으로 기쁘다.


세상에는 다양한 영역의 배움이 있다. 하지만 주저흔이 희미해진 지금까지 나는 자살이 인간의 기본 권리라고 말하는 배움을 찾지 못했다.


* 이미지는 미드저니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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