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돌말이 김밥_승연

: 몸과 마음을 앓는 두 여자의 생존 일지

by 승연

만 21살에 폐암 진단을 받고 왼쪽 폐를 전부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 후 10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고, 지금은 매년 연말이나 연초에 간단한 정기 검진을 받고 있는 중이다.


흡연자도 아닌데 그 어린 나이에 전폐절제술을 받았으니 날벼락이라면 날벼락이 맞았다. 날벼락이 무서운 것은 왜 이게 지금 내 머리 위로 떨어졌는지 이유가 없기에, 얼마든지 또 이유 없이 내 정수리를 때릴 거라는 불안함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매년 정기 검진 날이 다가오면 한 해 동안 애써 이뤄왔던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더 높은 성과를 내기 위해 억지 열정을 퍼붓던 시간이 의미를 잃었다. 대기실 앞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릴 때면 '이번 건강검진을 통과하면 뭔들 두려울 게 있겠어.'라고 다짐하며 당장이라도 사직서를 내고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사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3분 남짓의 짧은 진찰이 끝나고 진료실을 나오면 삶은 똑같이 흘러갔다.


검진을 받는 병원은 혜화역에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10여 년 전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암병동 1층 매점에 있는 '돌돌말이 김밥'을 무척 좋아했다. 새끼손가락만 한 꼬마 김밥이 한판 가득 담긴 김밥 도시락인데, 내용물은 채소 몇 종이 다지만 김이 정말 맛있다. 향긋한 바다냄새에 살짝 질긴 식감 덕에 오독오독한 당근, 단무지와 함께 씹는 맛을 더해줬다.



10년 사이 대학을 복학하고, 졸업하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대학원에 입학하고, 취직하고 퇴사하는 동안 매년 죄인이 된 심정으로 진료실 앞에 서서 '더 살아도 되겠네요.'라는 허락을 받으러 다녔다. 어떨 때는 죽음에 초연하고 싶다가도 그래도 노년까지 살아 노인의 혜안을 가져보고 싶다는 욕심에 온갖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렇게 서울대병원으로 소환될 때마다 '돌돌말이 김밥'을 찾았다. 한 해에 딱 한 번만 먹는, 나의 제철 음식. 작은 꼬마 김밥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대며 아직 식도 안으로 음식이 넘어간다는 것을 의식처럼 확인했다. 지독히도 두렵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는 동안 김밥은 늘 서울대학교병원 매점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적절한 밸런스가 사람의 행복을 결정한다. 양쪽 날개뼈를 따라 나 있는 수술 흉터가 붉은 지렁이 같은 모양에서 연분홍 털실처럼 연하고 작게 아무는 것처럼, 백 원짜리 동전 크기의 흉관 자국에도 슬슬 살이 차오르는 걸 발견하는 것처럼. 그리고 매년 안부 인사도 없이 만나는 의사 선생님과 나의 돌돌말이 김밥이 여전히 내 삶에 한 귀퉁이에 남아 있는 것까지.


올해는 연말부터 독감에 걸려 2주를 앓았다. 폐가 한쪽뿐인 터라 감기와 같은 증상이 오면 일반 사람들보다 회복 기간이 배가 들었다. 종일 골골대며 누워 있다 보면 나만큼 가성비 없는 인간이 있을까 자괴감이 들었다. 프리랜서 작가가 되겠다고 호기를 부렸다가 돈 한 푼 못 벌고 드러누운 시간을 견디려면 또 무기력의 늪바닥에 발끝을 찍고 일어서야 하니, '더 살아도 되겠네요.'라는 허가가 주는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 하나 책임지고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이야?


마우스 위에 손가락이 미끄러져서 인생을 '하드모드(HARD MODE)'로 잘못 설정한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가진 긍정과 재능으로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마이너스 체력에 폐렴에 취약한 몸뚱이로 남들처럼 돈을 벌고 살아야 한다니.


감기에 걸려 가래가 올라오면 가래를 제대로 뱉어내지 못한다. 폐가 한쪽이라 밀어내는 힘이 없어서인 건지 의학적인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어떤 날에는 가래가 하나 남은 기관지를 막아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공포를 느꼈다. 보통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이런 데서 죽는 건 너무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다 보면 다행히 기침이 터져 가래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럴 때는 랜덤으로 떠오르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행운과 불운의 반복. 또래보다 뒤처져 있다는 패배감. 내년이면 또 서울대병원 폐암센터 대기실에 앉아 내 환자 번호가 전광판에 뜨는 걸 기다리고 있겠지만, 늘 그렇듯 돌돌말이 김밥의 달고 향긋한 김의 맛이 그립겠지.


지금은 그 정도로도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