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le-out 트랜드. 패키징
며칠 전에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점점 현실 감각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일상이 점점 흐릿하고, 비일상성과 일상성의 구분이 어렵다. 흉악 범죄와 이상 기후가 일상이 되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해지면서 사무실에 출근하는 일이 더는 일상이 아니다. 탄탄하고 구체적인 선과 궤도가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윗 세대 분들이 확고하게 믿고 따르는 '국룰'이 왜 나에게만 적용이 안 되는 것 같은지. 혹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일까. 디디고 서있는 세계가 너무 물렁물렁해서 가만히 있으면 점점 깊이 빠지다가 알 수 없는 반대편으로 다시 나올 것 같다.
이상한 세상에 대해 쓴 이상한 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최근 반도체 산업의 트렌드가 정말로 이상하기 때문이다. 기하급수로 증가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이제는 양으로 승부(scale-out)를 보게 되었다. 전 편에서 다뤘지만, 반도체는 발열 등의 이유로 소모 전력에 상한선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일을 더 빨리 해내려면 전력 효율을 올려야 한다. 그런데 이 전력 효율 증가 속도가 수요의 증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자, 이제는 양을 늘리는 방식이 적극 도입이 되었다. 전력 효율 개선에 핵심 역할을 하는 미세공정 기술 발전이 기술적, 경제적으로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양을 늘리는 방식 자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지만, 양을 늘리는 속도가 이렇게까지 빠른 적은 없었다. 양이 늘어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반도체 수를 늘리는 것과 같다. 수가 늘게 되면 반도체 간, 혹은 서버 간 연결이 늘어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원의 증가를 촉진한다.
위의 그래프는 연결을 지원하는 스위치 반도체의 총 대역폭 증가 추이를 보여준다. 새로 생산하는 스위치 반도체(반도체간 연결을 관장하는 반도체)들의 처리 속도 합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수치가 기하급수로 증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한 '연결'이 기하급수로 증가함을 의미한다.
이 같은 트렌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 때문이다. 양이 늘면 당연히 소모 전력과 발열은 늘어난다. 양을 두 배로 늘리면 냉각 장치의 퍼포먼스도 두 배가 되어야 한다. 냉각 장치를 늘리면, 냉각 장치가 소모하는 에너지와 발열도 늘어난다. 업체들은 전력 효율 개선을 통해 발열도 소모 전력도 줄이고 있다고 선전을 하지만, 총량은 기하급수로 증가한다. 디지털 세상의 고도화 물결 앞에서는 이상 기후에 대한 경각심도 한 수 접는 듯하다. 특히, Chat-GPT가 불을 붙인 초거대 AI 모델에 대한 기대감은 데이터 센터 증축에 드는 리소스(돈, 에너지, 탄소배출권 등)를 아낌없이 쓰게 만들었다.
어쨌든, scale-out 트렌드로 인해 패키징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패키징 기술을 통해 여러 반도체를 한 세트로 묶어내고 있다. 실리콘 인터포저라는 큰 틀을 두고, 그 위에 다양한 반도체들을 올려 조립을 하는 식이다. 특히, 성격이 많이 다른 반도체들도 한 세트로 묶으려는 점이 흥미롭다. 메모리 반도체와 논리형 반도체, 그리고 저전력 고속 통신을 위한 광소자 반도체(optical semiconductor, co-packaged optics)도 같이 묶게 되었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와 논리 반도체를 세트로 묶으면 연결을 더 얇은 wire로 밀도 있게 할 수 있어서 성능 향상도 꾀할 수 있다 (high-bandwidth memory). 또한, 세트로 구성된 칩 간 통신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광통신(optical communication) 이 적극 도입되고 있다. 광통신은 원래 장거리 통신에서 널리 활용 되었지만 데이터 센터 내에서 중거리, 단거리 통신에 활용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기 신호와 빛 신호 사이의 교환을 하거나, 빛 신호를 조절하는 반도체 기술(silicon photonics)의 수급 안정성이 많이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Scale-out 트렌드로 인해 반도체 업계의 시장 규모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필요한 인력도 점점 늘어난다. scale-out은 데이터 저장, 이동, 처리에 대한 엄청난 수요 증가를 충족하기 위한 노력이다. 일거리가 유지되어 고마운 한편, 뜨거운 물류 창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된 노동을 하는 모습과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며 데이터 센터에서 일하는 반도체들을 나란히 떠올리면 뭐가 맞는건지 잘 모르겠다. 하와이에 난 큰 산불도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던데. 잘 모르겠다가도, 퇴근하고 누워서 유튜브 쇼츠를 한 시간 동안 넘기고 있다 보면, 수요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