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내놔
상충의 굴레를 벗어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을 벗어나는 게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혹은, 애초에 상충은 허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과감한 이직 후 행복을 누리면서, 좀 더 과감해지면 이 지긋지긋한 상충을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기술 발전을 비롯해 세상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나 빨라진 나머지 덜컥 내 현실을 가늠하던 여러 방정식들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김에, 상충에 대해 조금 써본다.
학부에서 처음 공학을 배울 때, 상충(trade-off)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한쪽의 이득을 얻으면 다른 쪽에서 이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으로, 공학적 의사 결정을 할 때 흔히 사용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제품의 성능을 올리면 원가가 증가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는데, 여기서는 성능과 가격 경쟁력이 상충 관계에 있다.
슬프게도, 이 같은 개념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살다 보니 알게 되는 자연스러운 세상의 원리였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달아나는 거지 뭐...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은 진부한 클리셰다. 나의 삶은 상충관계의 지배에서 벗어나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삶의 대부분의 순간이 상충관계에 놓이는 것은, 아무래도 자원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예산이 잡혀있다. 물리적으로도, 개념적으로도 그렇다. 우리 신체에 허락된 시간과 젊음이 총량이 고만고만하다. 태어날 때 이미 일굴 수 있는 부와 신분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간혹 예외가 있긴 하지만..).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해결하다 보니, 또 그것이 넉넉하기보다는 팍팍한 경우가 많다 보니, 삶의 대부분의 결정은 상충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공학은 현실 문제 해결을 다루므로, 상충의 지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한다. 당연히, 그래서 완벽보다는 최적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완벽해지려면 자원이 더 필요하고, 자원이 늘어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마감 기한이 늘어나거나, 유능한 인력이 대거 추가되거나, 프로젝트가 실패해도 아무 리스크가 없거나, 지구 표면 온도가 10도쯤 올라가도 아무 문제없거나 하는 일들은 반가운 일이지만 드물다.
상충에 익숙해지는 것은 어쩐지 슬프다. 늘 한계를 둬야 하고, 낙관보다는 비관과 친해져야 한다. 완벽한 대상을 보면 비쌀 것이라, 혹은 내 것일 리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을 기다리게 한다. 공학을 하기도 하고, 또 어쩌면 양쪽을 다 가지는 경험은 거의 없은지라, 상충과 점점 친해지는 나의 인생... 슬프다. 아마도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충과 친해지는 방향으로 인생을 겪을 것이다.
상충을 깨는 이야기는 달콤하지만, 늘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1000년을 살았는데도 젊음을 유지하는 도깨비 이야기. 놀면서 돈 번다는 이야기. 맛있게, 양껏 먹으면서 살이 빠진다는 이야기. 큰 기업을 이끄는 능력 좋은, 잘생긴 회장님의 이야기. 상충에 익숙해진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판타지라고 부른다. 혹은, 저 마다 속 사정이 있겠거니 한다. 혹은, 실재하더라도 '남' 얘기일 뿐이라 생각한다.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멀리 떨어진 사람과 대화할 수 있고,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잘 수 있는 삶은 옛 선조들의 삶에서는 상충을 벗어난 일일 것이다. 공학의 산물은 인류의 현실을 까마득히 먼 곳으로 이끌어 왔다. 늘 상충 속에서 최적의 방법을 탐구하던 공학자들은, 재밌게도 그 모든 상충을 깨고, 초월한 현실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그렇게 도착한 이곳 현실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상충관계가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진짜 현실을 깨우치라 말하는 사람들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요즘 유난히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시뮬레이션일 뿐인 이 세상에서 진짜 현실을 자각하라던가 하는 메시지들. 혹은 상충에 지쳐서, 특이점이 왔다고 느껴서 이런 메시지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