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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니 Sep 11. 2024

 삶의 시정수

더 지나 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회로 시스템에는 시정수가 존재한다. 한 지점의 상태(전압)가 한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약 63% 정도 바뀌는데 소요되는 시간이며, 회로 시스템의 다양한 시간 값들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 시간으로 작용한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변화 시간이다. 또한, 시스템을 주파수 영역으로 해석하고자 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패턴의 편화은 이 시정수의 역수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한 시스템이 가지는 가장 대표적인 시간 단위, 혹은 변화 속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낯선 개념이다. 물론 시정수가 가지는 모든 복합적, 행간의 의미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전공자라도 어렵다. 대가들이 논할 만한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한 시스템 내에 대표적인 시간값이 정의된다는 것은 참 그럴싸한 이야기다.


 인간의 삶을 예로 들면, 그 시정수는 전체 살아온 인생 시간의 대략 60% 정도 되는 값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가장 큰 두 상태는 삶과 죽음이니, 이 변화 시간의 60% 정도면 얼추 시정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세 시대라면 대략 60% 이려나. 물론, 아직 죽음을 맞이하지 않은 이라면, 그 시정수는 가변적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죽음을 겪지 않았고, 또 언제 죽음이 올 지 모르기 때문에 시정수는 역시 살아온 전체 시간에 비례에 책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또 다양한 상태 변화들을 기준으로, 또 저마다의 다양한 시정수들 또한 존재하지 않을까. (라고 아무 말이나 해본다)




 인생의 시정수는 어떤 사건들을 인지할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시정수보다 훨씬 긴 호흡의 사건들을 인지하기 어려울 것이며, 반대로, 시정수보다 훨씬 짧은 사건들에는 무신경해질 수 있다. 고작 2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 50년이 걸리는 인생의 대 사건을 올바로 가늠하기란 어려울 것이며, 80년을 살아온 이는 고작 1년짜리 사건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을 수 있다.


 신입사원 시절, 30년이 넘게 한 회사에 근무한 한 어른의 갑작스러운 퇴임 소식을 듣고는, 회사 일은 참 예측이 어려운 것 같다는 어린 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 어른께서는 나에게, 더 긴 호흡으로 보면 결국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회사 생활로 치면 짧디 짧은 시정수를 가졌을 나에게, 긴 호흡의 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나 보니, 이제 조금은 더 긴 사건들이 눈에 보인다. 한 해를 시작해 마무리하는 과정이 눈에 보이고, 3년이 넘는 긴 프로젝트의 시작과 마무리 과정이 아른아른 눈에 보인다. 하물며 30년이 넘는 시간이라면, 조직의 흥망을 비롯해 더 크고 긴 호흡들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기록된(recorded) 신호를 분석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그 신호를 주파수 영역으로 가져가 보는 것이다. 어떤 주파수에 에너지가 밀집되는지, 혹은 어떤 패턴들이 보이는지 보면 신호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소리를 예로 들면, 에너지가 밀집된 주파수 지점들이 각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에 따라 소리의 질감을 알 수 있다. 짝수 관계인가. 홀수 관계인가. 그것이 결정하는 것은 소리의 음색(timbre)이다. 허스키한 목소리와 맑은 목소리 또한 주파수 분석만 보아도 구분이 가능하다.


 재밌는 것은, 기록된 시간 길이에 따라, 담을 수 있는 주파수 지점들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오랜 시간 기록해야 낮은 주파수의 형세를 알 수 있다. 낮은 수파수, 느린 사건들이 어떠한지 알고 싶다면 길게 기록해야 한다. 사건들도 저마다의 시정수를 가지고 있다면, 호흡이 긴 사건들의 영향을 알기 위해서는 더 긴 시간을 지켜봐야만 한다.

 


 

 때로 조급하더라도, 호흡이 긴 일들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 지도 모르고, 어떻게 풀릴지 모른다. 끝까지 가 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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