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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라시라 May 24. 2020

외할머니의 밥상

시골집이 그리운 외할머니

경기도 가평 봉수리
우리 외할머니가 사셨던 곳이다
유난히도 물 맑고 공기 좋은 시골
그래서인지 외할머니댁만 가면 음식 맛이 더 좋았다
할머니는 무슨 음식이든 뚝딱 만드셨다
할머니표 된장에 큰 멸치. 고추장아찌만 넣고 보글보글

끓인 차마 손님상에 내놓기엔 부끄러운 비주얼인 

된장찌개.

그래도 그 맛은 정말 밥 두 그릇 뚝딱할 정도로 맛났다.
그리고 총각김치를 달랭이라고 부르셨는데

그 달랭이 맛은 42살인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맛이다.

어릴 적에 엄마는 부산에서 경기도까지 방학 때마다

우리를 외할머니 집으로 보내셨다.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계속 보냈었는데
4남매였던 우리는 2명씩, 큰딸인 나는 매번 방학 때마다 할머니 집으로 갔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그랬는지

잘 놀다가도 저녁노을이 질 때쯤이면 그렇게도 집 처마 밑에서 훌쩍이며 울었다고 한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엄마께 물어보니 아빠 사업이 어려워져서 힘들어서 그러셨다는 얘기를 듣고 코끝이 찡해졌었다.

방학 때마다 시골에 가서일까 아니면 매번 갔던 시골이 지금은 없어져서일까
42살인 나는 시골이 너무나 그립다.
도시의 찌든 냄새 말고 흙냄새 싱그러운 풀냄새가 나는 시골이 그립다.
그리고 할머니 음식이 그립다.

할머니 댁 근처 아랫마을에는 외삼촌도 살고 계셨는데 삼촌은 방학 때마다 올라오는 조카들을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좋아해 주셨다.
우리가 올라가면 산에서 캐오신 나물이며 버섯을 한가득 할머니 집으로 가져오셨는데 그러면 할머니는 산나물 무침이랑 능이버섯 돼지고기볶음을 해주셨다.

고소한 참기름이 들어간 산나물 무침도 맛있었지만
산에서 직접 따오신 귀한 능이버섯으로 돼지고기 넣고 볶아주시면 고기보다도 능이버섯이 더 맛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어린 우리는 그 귀한 능이버섯만 쏙쏙 골라먹었고 할머니께서는 돼지고기 점만 드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철이 없었다.

방학중에서도 유난히 겨울방학엔 더 먹거리, 놀거리가 풍성했다.

외할머니 집에는 외사촌들이 3명 있었는데 모두 또래라

마음이 잘 맞았다.

우리는 군인 아저씨들이 물을 뿌려 만든 스케이트장에

매일 점심 일찍 먹고 나가 저녁 먹을 때까지 놀곤 했다

볼이 빨개지고 손이 틀 정도로 추운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있게 스케이트를 탔다.

외할아지께서 

"얘들아~  이제 고만 놀고 밥 먹어야지"

하고 찾으러오시면 그때서야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그렇지만 아쉬운 마음도 잠시 뿐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코끝에 닿는 맛있는 냄새가

또 다른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

그럼 누구랄 것도 없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마루를

지나 방으로 서로 들어가려고 난리도 아니었다.

어차피 다 먹고 남는대도 말이다 .

물론 하루 종일 스케이트를 탔으니 모든 음식이 꿀맛이기도 겠지만 할머니의 손맛은 여느 요리사 보다도 뛰어나셨다

옛날식 샐러드 부터 할머니 고추장으로 맛을 낸 콤하면서도 달콤한 돼지 두루치기, 밭에서 직접 심어 만드신 열무김치, 파김치, 배추김치.

특히나 겨울에 담그신 동치미는 정말 톡 쏘는 맛이 사이다보다도 더 맛있었다.

동치미 담그면서 말려두신 무청시래기로 된장 넣고 푹

끓인 시래기국은 국솥이 바닥이 보일 정도까지 먹었다.

그렇게 배가 빵빵해질 정도로 먹어도 할머니께서는 또

손수 말리신 곶감이며 고구마 말랭이, 사과를 주시곤 했다

할머니 댁 바로 뒤편에 배나무,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수확해서 파시고 상처 나거나 한 것을 저장해 두셨다가 우리가 가면 주셨는데 겉모양은 이상해도 맛은 최고였다

그렇게 밤이 저물면 우리는 할머니 곁에 모여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의 아침은 너무나 빠르셨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인데도 부지런한 성격 때문신지 새벽부터 일어나셔서 할아버지를 도와 아궁이에 불을 때시고 소여물 끓이시고 아침 준비를 하셨다

그러면 자면서도 그 장작 타는 냄새와 소여물 끓이는

냄새가 좋아 코를 벌름거렸던 기억이 있다

옛날 시골엔 커튼도 없고 하니 창호지에 햇빛이 스며들면 그때가 우리들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불도 개켜보고 빗자루로 방도 쓸었다

그리고는 추워도 대청마루로 나가 할아버지ㆍ할머니께 아침인사를 하고 그대로 마루에 앉아있었다

그 차가움이 좋진 않았지만 싱그러운 공기와 햇살, 그리고 할머니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면 할머니께선 삐걱 소리와 함께 부엌문을 밀고 나오셔서 추우니 어서 들어가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래도 우리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추운지도 모르고 마루에서 한참을 놀았다.

할머니는 그러면 "고 녀석들" 하시면서도 웃으시며

또 아침 준비하시러 부엌으로 향하셨다.

할머니의 아침은 늘 새로운 음식들이 가득했다.

장날에 사두셨던 고등어를 가마솥 밥 짓고 남은 군불로 석쇠에 올려서 구워주시고, 직접 맷돌에 콩 갈아 만든

 두부도 지져주시고 직접 기르신 콩나물로 시원한 김치 콩나물국도 끓여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맛있다 맛있다를 연신 외치며 한 그릇

뚝딱 먹었다

그리고는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도 하고 눈 내린 날엔 눈사람도 만들고 놀았다

그렇게 놀다 우리가

"할머니, 배꼽시계 울려요. 배고파요"

하면 끓여주시는 게 있었다. 바로 김치수제비였다.

냉장고에 숙성시켜 놓은 찰진 밀가루 반죽을 꺼내서 멸치육수 우린 물에 김치 넣고 반죽을 얇게 떠 넣는 너무나 맛있었던 김치수제비.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시골에 겨울은 조금은 여유가 있어서 여름방학 때보다는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던 거 같다


어릴 적부터 방학 때마다 할머니 집을 가서 밥을 먹어서인지

입맛이 유독 한식을 고집한다

사춘기 시절도 더 컸을 때도 입맛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임신했을 때조차 할머니 음식이 먹고 싶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점점 커가고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할 때도 때마다 동치미며 김장김치, 열무김치, 달랭이 무, 파김치 기타 많은 음식을 보내주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릴 때처럼 맛있다 맛있다를 외치며

음식을 먹었었다

그때 나는 더 오랫동안 할머니 음식을 먹을 줄 알았다

아마 우리 엄마도 그러셨을 거다

할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큰 외삼촌마저 떠나보내셨을 때 할머니께서는 너무나 큰 상처를 받으신 거 같았다

할머니께서는 잘 웃지 않으셨고 시골집을 떠나고 싶어 하셨다

자식들이 많은데 내 한 몸 뉘 일 없겠냐시며.

그렇게 시골집은 사라졌고 할머니의 음식도 사라졌다

할머니께서는 그 후로 자식들 집을 이곳저곳 옮겨다니셨다

그런데 품 안에 자식이라고 했던가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집이 없으셨다

그렇게 몇 년을 전전하시다가 할머니께서는 병을 앓게 되셨다

지금까지 8년째 할머니께서 앓고 계신 병은 치매다

그렇게 건강하시고 밝으시고 깔끔하셨던 분이셨는데

지금은 겨우 자식들 이름만 아는 정도시다

거동도 안되셔서 휠체어에 타시고 기저귀도 차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골집이 생각나셨는지 보는 사람 모두에게 집에 좀 데려달라며 그러신다

한 번은 엄마 집에 간 나에게 할머니께서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 몇 장을 주시길래

"할머니,  저 용돈 주시는 거예요?" 웃으며 말했더니 할머니는

" 나 차비 다 냈으니 나 집에 좀 데려다줘요" 하시며

계속 봉수리 가고 싶다, 가고싶다 그러시고

또 큰 아들 생각이 나셨는지

" 아들은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지 한 번을 안 오네"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길래 엄마랑 나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최근까지 막내딸인 우리 엄마 집에 계시던 할머니께서는 너무나 난동도 부리시고 밤새 소리만치시고 대소변이 어려우셔서 아파트에서 민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요양병원으로 들어가게 되셨다

(다른분들은 모실 수 없다 하셔서)


외손주인 나는 우리 할머니 요양병원 들어가 신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어릴 적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나고 할머니 사랑이 너무나 느껴져서 말이다


치매 걸리시고 한 1년쯤 지났을 때 할머니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할머니,  저 김치 좀 해주세요" 했더니

"이제는 늙어서 방법을 까먹어버렸어" 그러셨는데

그래도 엄마랑 도와서 할머니랑 열무김치를 담았었다

시골에서 먹던 맛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는데


우리 할머니

불쌍한 우리 할머니

고생만 많이 하시다 행복하게 사시지도 못하고 이제는

마음의 병이 커져 치매를 앓고 계신다

어릴 적 받았던 사랑 이제 외손주가 돌려드려야 하는데

할머니는 그냥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신다

얼마나 할머니가 좋은지 얼마나 할머니 음식이 그리운지

말씀드려도 모르시고...

너무나 안타깝다

너무나 마음이 쓰리다


이제 내가 바라는 건 그 모습 이시더라도 좀 더 우리 곁에 오래 머무르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할머니 솜씨까지는 아니겠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조금이나마 접해 드리고 싶다

어릴 적 우리에게 해주신 할머니의 음식처럼.


맛은 비슷하지 않지만 할머니 흉내 내 본 음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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