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장거리 연애
‘진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이상하게도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을까. 하지만 오랜 시간 알 수 없던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통해 아주 조금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재밌다’라는 말로는 모두 표현하기 힘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관전 포인트는 아마도 관계를 풀어나가는 다섯 청춘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바라보는 데 있었을 것이다. 사랑과 우정을 중심으로 이끌어진 드라마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계의 핵심에는 부모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부모와의 갈등, 부모의 삶이 던져준 인생의 갈등, 그리고 부모를 지키기 위한 갈등 그리고 그에 따른 다섯 청춘의 각자 다른 선택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성장이 바로 이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이유가 아닐까. 우리 인간은 유아기 시절부터 청소년기 시절까지 경험한 유대관계를 통해 인격을 형성하고 그것은 때로 인생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 이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어리고 여린 청춘들의 삶을 때로는 무너지게 그리고 때로는 단단하게 이끌어준 원동력이 되어주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아빠의 죽음 이후 서먹해진 엄마와의 관계 속에 형성된 독립심은 희도의 인생을 더욱더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죄책감이 아닌 분노 그리고 사랑보단 애증으로 쌓인 엄마와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통해 새롭게 세워지는데 그것은 이해라는 이름을 가진 가족의 형태로 바뀐다. 서로에게 서로가 가장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표현하지 못했고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살아온 두 모녀에게는 사실 오해가 풀린 뒤에도 엄청난 다정한 바람이 불어오지는 않는다. 변함없이 서로에게 쓴소리를 하고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 두 사람에게는 여전히 각자의 공간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부모와의 신뢰 관계가 구축된 희도에게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린 희도의 인생을 지탱해준 독립심과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성인으로 성장한 그녀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본인의 인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때로는 돈, 자주는 가족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가족들이 우선이었던 유림은 러시아로의 귀화를 선택한다.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로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면 운동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를 다른 이들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명예도 꿈도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드라마였기 때문에 나는 그나마 유림이를 덜 가여워 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알아주는 펜싱선수, 가족을 살릴 만큼의 돈, 그리고 자신을 기다려준 연인까지. 어떻게 보면 유림이는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인생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현실은 이보다 더 현실적이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보장되지 않은 노후를 걱정하며 어린 시절 꿈 따위는 잊고 사는 젊은이가 수두룩 빽빽하다.
내게도 가장 힘든 순간은 바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이다. 해드린 것 없이 흘러가는 세월과 이 흔한 벚꽃조차 함께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끔은 사무치게 눈물이 난다. 그렇게 어둠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날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부모님의 품에서 자란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나 자신의 삶 또한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지에서 느끼는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을 꿈을 밀고 나가는 원동력으로 바꿔버린다. 그렇게 외롭던 어린 시절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부모님의 품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게 했다.
때문에 나는 희도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안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듣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지 또한 안다. 허나 슬픔 속에 주저앉지 않고 스스로로 일어선 희도는 모든 것을 이룰 무궁무진한 힘을 얻었고 결국 이루었다.
당당하고 정의로운 희도는 사랑스럽다. 순수하고 맑지만 속은 깊고 어른스러워 곁의 존재들을 늘 웃게 한다. 그래서였을까 사랑하는 이가 쫓는 꿈을 받아들이고 놓아주었다. 펜싱할 때처럼, 꿈을 좇을 때처럼 조금만 더 악을 써서 붙잡았으면 했는데 그녀는 흘러가는 사람을 흘러가게 두었다.
약 7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을 만나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던 나에게 희도의 선택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름 진한 사랑을 해보았다 자부하는 나였음에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내가 한 사랑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씁쓸해하곤 했는데 아니 결말은 왜 이런 거야?
며칠 전 한국에 사는 친한 친구가 전화기 너머로 ‘네가 만났던 그 사람 백이진같다’라는 말을 했다. ‘응원하니까 붙잡지 않고 보내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만남 그거 네가 한 거 아니야?’ 씁쓸한 웃음이 났다. 하지만 한 가지 차이점은 현실 속 그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서로를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학을 선택한 여자 친구의 꿈을 응원한 그는 나를 멀리 날아가게 두었다. 하지만 이별을 말하지 않았다. ‘오래, 자주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헤어지기에 우리는 당시 서로에게 너무도 의미가 있었다. 물론 1년에서 2년,.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부풀었던 사랑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너를 응원해. 네 모든 선택을 존중해.’ 그가 했던 말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이뤄. 나는 이곳에서 열심히 할게.’ 이것은 그가 더 자주 했던 말이다. 그 사람은 우리의 장거리 연애를 이렇게 정의했다. 다른 곳에 있지만 그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연락이 닿고 음성이 닿고 언젠가는 다시 손끝이 닿을 것이다. 인생의 긴 여정 앞에 지금의 이별은 점으로 채워질 수많은 나날들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 나는 희도와 이진에게 이것을 기대했다. 모두가 이별을 예언할 때 내 모든 감각은 그들의 극복을 응원했다. 그래서 마지막화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이를 놓을 수 없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 특파원을 신청한 그 남자가 미친 듯이 미워도 그를 내가 없는 세상으로 보내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나 나의 무너짐과 일어섬 가운데 함께한 사람이라면, 누구보다 다정했던 이라면 쉽게 보낼 수 없다.
이진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어렸기 때문에, 그 사람을 나로 인해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도 안 되는) 배려심 때문에 희도의 선택을 존중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뒤바꾼 여인에게 단 한마디의 설명도 설득도 없이 인생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며 삶 속에서 전력을 다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만 담아두는 것이 정말로 현실적일까? 아니.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랑하면 절박해진다. 무엇보다 이처럼 셀 수 없는 감정의 선들로연결된 인연은 쉽게 끊길 수가 없다.
나의 과몰입은 아마도 내가 처한 상황에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힘겹고 긴 장거리 연애를 끝내고 새로운 이를 만나보려는 시도도 해보았다. 하지만 언제나 실패했던 이유는 꿈을 지지해주고 나를 넓은 세상으로 보내준 누군가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사랑보다 더한 서사를 보여준 두 사람이 ‘헤어지자’는 한마디로 쉽게 끊어진 것은 철없이 헤어진 흔한 사랑이야기의 결말보다 더 허무하다.
그럼에도 다시 ‘사랑’이라는 결말로 돌아가고픈 이유는 희도가 결국 가장 사랑한 사람은 희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시간이 흘러 희도가 엄마가 된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잃은 사랑도, 보낸 사랑도 모든 것이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곁에 존재하는 사랑은 그나마 아주 조금 더 생동감을 지닌 채 존재감을 보이겠지만 이마저도 언젠가 흐려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나이 든 모습을 보며 젊은 시절의 사랑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희미해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지막화는 보지 않기로 했다. 머물지 않고 옅어지는 청춘임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또한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보고 싶기 때문에.